원로 배우 이순재가 91세 일기로 별세했다. 한국 TV 드라마의 초창기부터 무대와 브라운관을 지켜온 그는 ‘국민배우’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만큼 세대를 초월한 사랑을 받았다. 데뷔 이후 7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배우·예능인·정치인·교육자로 활동하며 한국 문화예술사의 중요한 한 축을 이끌어 온 그의 삶을 되짚어본다.

#천생 배우 이순재
고인은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할아버지와 함께 남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초등학교 시절 해방을 맞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일찍이 연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전고등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올리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다니던 1956년 신영균, 이낙훈, 황은진 등 동기들과 함께 연극반을 재건하기도 했다.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했으며,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그 첫발을 내디뎠다.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한방송의 드라마 ‘푸른지평선’에 출연하며 브라운관에서도 얼굴을 알렸다.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되면서 100편이 넘는 드라마에 등장했고,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로 조연으로 활약하며 한국 방송 역사를 함께 해왔다.

그러다 57세이던 1991년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가부장적인 인쇄소 사장 ‘대발이 아버지’ 이병호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평균 시청률이 역대 1위에 해당하는 59.6%를 기록했고, 인기에 힘입어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1996년 정계를 은퇴한 뒤에는 사극 전성시대도 이끌었다. ‘허준’(1999)에서 허준의 스승 유의태를 연기해 다시 한번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고, 이후 ‘상도’(2001), ‘장희빈(2002)’, ‘불멸의 이순신(2004)’, ‘이산’(2007) 등을 카리스마 넘치고 묵직한 연기로 히트시켰다.

70대에 들어서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에서는 기존의 근엄한 이미지를 내려놓고 괴팍하고 권위 없는 한의원 원장을 연기하며 코믹 연기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친척들 앞에서 야한 동영상을 보는 모습이 들키는 에피소드로 ‘야동 순재’라는 별칭까지 생겨 젊은 세대에게도 친숙한 이미지를 쌓았다. 속편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서도 사위인 정보석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2013년에는 tvN의 여행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신구, 박근형, 백일섭과 함께 출연하며 예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80세가 코앞인 나이에도 비행기에서 잠을 청하지 않고 공부하거나,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불평 없이 촬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줘 시청자들을 감동시켰고, 이후로도 2014년, 2015년, 2018년까지 ‘꽃할배’ 시리즈의 맏형으로 팀을 이끌었다.

말년의 그는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활약했지만, 연극 무대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연극 무대로 돌아온 이순재는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세일즈맨의 죽음’(2017), ‘리어왕’(2021)에서 열연을 펼쳤다. 특히 ‘리어왕’에서 당시 87세이던 그는 백발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200분 동안 방대한 대사를 완벽 소화해 관객의 극찬을 끌어내기도 했다.

지난해까지 이순재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했고,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가 됐다. 아울러 연기자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며,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자신이 연출한 작품 출연하는 이순재/연합뉴스
자신이 연출한 작품 출연하는 이순재/연합뉴스

#별세
고인은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지난해 말부터 급격히 건강이 악화했고, 재활을 병행했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하던 그는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였다.

2003년 연극 '리어왕: KING LEAR' 연습실 공개 및 간담회에서 주요 장면 시연하는 배우 이순재/연합뉴스

#추모 물결
원로 배우 이순재의 별세 소식에 각계의 추모가 이어졌다. ‘꽃할배’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이날 열린 한 예능 제작발표회에서 “최근 1년 동안 선생님 몸이 안 좋으셔서 뵙지를 못했는데 갑작스레 소식이 들려 당황했다”며 “선생님이 생전 여행에서, 사석에서 가장 많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끝까지 무대 위에 있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성실하게 일하는 것의 가치를 알려주시고 후배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 분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몸편히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실 수 있기를 기도하겠다”고 했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함께 호흡한 배우 정보석도 SNS에 “선생님,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연기도, 삶도, 배우로서의 자세도 많이 배우고 느꼈습니다”라며 “제 인생의 참 스승이신 선생님. 선생님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방송 연기의 시작이자 역사였다”고 애통함을 표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받은 예술인이자, 국민 배우였던 선생님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며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페이스북에 “한 시대를 넘어 세대를 잇는 ‘모두의 배우’를 떠나보낸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며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큰 어른이셨던 이순재 선생님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고 애도했다.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탤런트 이순재. /연합뉴스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탤런트 이순재. /연합뉴스

#그가 남긴 말들
고인은 생전에 업계 관행을 꼬집거나 자신의 철학을 담아낸 말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연기란 오랜 시간 갈고 닦아 모양을 내야 하는, 완성할 수 없는 보석”이라고 했고, “배우라면 자신이 맡은 배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말년까지도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누구보다 책임감 강하고 연기를 사랑했던 그는 죽기 직전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의지와 배우로서의 소명의식을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 2023년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서는 “내 소망은 무대에서 쓰러지는 것이다. 그게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했으며, 지난해 방영된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조건이 허락된다면 가장 행복한 것은 공연을 하다 죽는 것이다. 무대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원로 배우로서 업계의 잘못된 관행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순재는 지난 2010년 ‘지붕뚫고 하이킥’ 종방연에서 “작업 과정은 지옥이었다. 젊은 친구들이 생사를 걸고 한 작품”이라며 “이제는 완전한 사전제작제로 들어가야 한다”고 작심 발언을 내놨다. 이듬해 MBC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가 이른바 ‘쪽대본’ 논란에 휩싸이자 “어느 나라가 이렇게 드라마를 만드느냐”며 “외주제작을 의뢰할 때 적어도 열흘 전에 대본을 넘겨 검사할 시간을 달라는 계약을 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공식 석상에서 남긴 그의 마지막 수상 소감도 화제를 모았다. 그는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온다”며 “보고 계실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고 밝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줬다.

무대를 사랑했던 배우의 마지막 길에 깊은 애도를 전하며, 국민배우 이순재가 남긴 유산이 한국 문화예술계에 오래도록 살아 있기를 바란다.

시선뉴스=양원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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