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정혜인 기자ㅣ지난달 18일 오전,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향년 77세로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2월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으며,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며 살았던 홍세화는 어떤 사람일까.

홍세화는 우리나라의 언론인, 사회운동가, 평론가이자 작가였다. 1947년생인 그는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다니다가 자퇴했다. 그리고 재수해 서울대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했는데, 문리과대학 연극반에서 활동하며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투쟁에 앞장서 활동했고,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됐다.

1974년에는 군 복무 중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국군보안사령부에서 고문받기도 했다. 민청학련 사건은 유신정권에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며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여 명이 구속, 기소된 일을 말한다. 이때 박정희 정권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서 고문과 강압수사를 진행했다. 

이렇듯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1977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졸업 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들어가는 한편, 무역회사에 입사해 유럽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중 1979년,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남민전은 1976년에 이재문, 신향식, 김병원 등이 반유신 민주화를 위해 조직한 비밀단체로, 반유신투쟁을 전개했다. 해당 조직원은 결국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으로 처벌받기도 했다. 이 일에 연루된 홍세화는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해 한동안 택시 기사로 지냈다.

프랑스 망명 중일 때 그의 이야기는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프랑스 택시 기사의 생활을 비롯해 당시 프랑스 사회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책에서 그는 한국 사회 변화의 필요성도 내비쳤다. 

그가 망명 생활을 한 지 20년이 지났을 무렵인 1999년, 그는 서울로 일시 귀국해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홍세화는 “도시 전체가 인간적 정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략) 철학만 가졌다면 한강을 파리의 센강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홍세화가 완전히 귀국한 것은 2002년이었다. 그 이후 한겨레신문 편집국 기획위원을 맡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 등 다양한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2015년,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어려운 형편으로 벌금을 낼 수 없는 취약계층을 위해 ‘장발장은행’을 설립했다. 

그는 떠나기 전 병실에서도 한겨레21과 인터뷰를 진행해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목소리를 냈다. 홍세화는 소수자, 난민,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등 약자의 편에 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누구보다 바삐 살아온 만큼, 이제는 세상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편안하게 잠들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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