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90년대 처절한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은 2000년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했다.그러나 이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선언일 뿐 결코 경제 사정은 그렇지가 않았다.북한은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2002년 7.1 조치 도입으로 장마당을 경제의 주체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사실상의 가격자유화 조치를 취해 시장경제 체제를 일부 도입하였다. 또한 2005년 배급 정상화를 선언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모색해 봤지만 이미 무너진 기반을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게다가 GDP
[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1990년대 북한은 80년대부터 차곡차곡 쌓였던 경제 위기 조짐이 실체화 되는 시기였다.1989년 폴란드의 첫 자유총선에서 자유노조가 압승하는 것을 시작으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이루어졌으며 소련이 붕괴되었다.북한은 실질적으로 소련과 중국에 의존하는 상태였는데 소련은 물론이고 중국 역시 덩샤오핑의 주도로 개혁개방이 이루어져 북한의 대외시장은 사실상 고립되었다.주요 교역국이었던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노선을 변경하면서 혼란에 빠져 북한은 산업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나 생산재의
[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일제 강점기 이래 한반도 북부에는 막대한 중화학 공업 투자가 이루어졌었다. 1918년 일본제철이 겸이포 제철소를 건설하였고, 1930년대에는 일본질소비료에 의해 흥남비료공장이 세워진다. 또한, 압록강에 수풍수력발전소 등 여러 수력 발전소를 건립해서 만주국과 한반도에 전력을 공급하였다.일제는 패망을 하였고 어쩔 수 없이 막대하게 투자해 놓은 공장과 생산물자들을 그대로 둔 채 한반도를 떠나야 했다. 북한은 이를 그대로 접수하여 남한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갖출 수 있었고 조선 노동당은 이를 바탕으로 19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김미양] 2011년 12월 17일 김정은이 사망하면서 그의 차남인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하게 된다. 이로써 김정은은 역사상 전대미문인 3대 권력 세습에 성공하게 된다.김정은은 김정일과 고용희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크게 드러난 것이 많지 않았고 장남인 김정남에 비해 외부에 드러나는 일도 거의 없었다.청소년기에는 유럽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박운’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유학생활을 외국문물을 많이 접하기도 하였다.김정은은 김정일이 사망하기 2~3년 전부터 등장하여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1946년 4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되어 서울에 본부를 둔 ‘조선공산당’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조직이 되었다.1946년 6월 24일 노동법령, 1946년 7월 30일 남녀평등권법령을 시행한 이후 ‘중요산업 국유화법령(1946. 08. 10)을 발표하여 일본인 흑인 민족반역자가 소유하던 기업소, 광산, 산림, 어장, 발전소, 철도, 운소, 체신, 은행, 상업, 문화관계 산업 등을 국유화시켰다. 이는 전체 산업의 90%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소규모의 개인 수공업과
[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1945년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통해 김일성이 공식적으로 전면에 나섰고 당이 통일된 조직체계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했다.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더불어 기독교도가 많은 우파세력이 계속적으로 남한으로 내려와 저항세력이 미약했기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조선독립동맹(속칭 연안파)’과 그 산하군대인 ‘조선의용군’이 무장해제를 당한 후 1946년에 뒤늦게 귀국해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고 중국공산당과 가까웠던 점 때문에 소련의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김미양] 북한 정권은 해방이 될 무렵 소련의 점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평남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각지에 건국준비조직을 결성하고 자치활동을 전개하였다.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해방이 되기 이전, 만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이미 두만강을 건너북한에 진주하였고 1945년 8월 24일 평양에 치스차코프를 사령관으로 하는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소련군은 군정을 통한 직접통치를 피하고 각 지방별로 좌우합작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치를 하
[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2007년 12월 치러진 제 17대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어 이듬해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하였다.이명박 정부는 '선진화를 통한 세계일류국가'를 국가 비전으로 삼는 실용정부를 규범으로 삼았고 국민을 섬기는 정부, 활기찬 시장경제, 능동적 복지, 인재대국, 성숙한 세계국가를 5대 국정지표로 삼았다.이명박 정부는 작지만 유능한 실용정부를 표방하며 이전 정부의 '18부 4처 18청'에서 '15부 2처 18청'으로 축소하였고 경제와 교육,
[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외환위기를 겪는 와중에 1997년 12월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국민의 정부’로 명명된 이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천명하고 이를 위해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 난국의 극복, 국민 화합의 실현, 법과 질서의 수호, 남북 교류와 협력 등의 국가적 과제를 제시하는 것을 국정지표로 삼았다.2000년 4월 13일 치러진 제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33석, 민주당은 115석, 자민련은 17석, 민국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군부세력의 연장 집권이었던 노태우 정권이 끝나고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서 ‘문민정부’가 시작되었다. 문민정부의 국정 지표는 깨끗한 정부, 튼튼한 경제, 건강한 사회, 통일된 조국 건설로 설정하였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수행하였다. 먼저 개혁 정책으로는 공직자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를 의무화하고, 전면적인 지방자치제(지방자치단체장)를 실시하였다. 또한 12·12사태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 조사 활동을 벌여 전두환, 노태우 등의 쿠데타 세력들을 구속하였다. 1996년 4월 1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총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평화민주당(김대중), 통일민주당(김영삼), 민주공화당(김종필) 등 야당이 여당인 민정당을 누르고 다수 의석을 차지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들 삼김은 출신지역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지역당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1988년 11월 여소야대 국회에서 ‘청문회법’을 신설하여 ‘광주학살’ 등을 중심으로 전두환 부부와 친인척의 뇌물수수 등 5공화국의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나는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86년 아시아게임 이후 전두환 정권은 개헌투쟁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강경한 탄압공세를 취했다. 한편 민족민주운동세력은 건국대 농성투쟁에서 1,300여명의 구속과 개헌서명 서울대회의 무산. 그리고 제헌의회사건 등으로 인해 일시적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박종철 고문살인사건은 민족민주운동진영이 분기하는 전환기가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전두환 정부는 4월 13일 특별담화를 통해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올림픽 등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론을 분열시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81년 3월 3일 제8차헌법에 의거하여 구성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전두환 단일후보가 12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국보위 시기에 이어 제5공화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제5공화국은 이듬해인 84년 2월까지 체제정비기를 갖게 되는데 한·일경제협력이나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집단방위 체제 구축을 근거로 하여 궁극적으로 미국과 일본, 한국의 경제적·군사적·정치적 동맹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개방’을 주장한다. 이로 인해 외국기업의 대한투자 문호 개방·수입자유화 확대 조치가 이루어져 한국경제의 대미·대일 종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광주 민중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계엄사령부는 부정축재, 국기문란, 시위주도, 배후조종 등의 혐의로 정치인과 교수, 목사 및 언론인, 학생 등 329명을 지명수배 하였고 고급 공무원 수 백 명을 해직하였다. 또한 폭력배와 사회문란 사범의 순화를 명목으로 국보위가 군부대 내에 삼청교육대라는 특수 훈련장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삼청교육대의 원래 취지와는 다르게 수많은 시민들이 끌려갔고 매일 군대식 훈련과 힘든 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수가 사망하기도 하였다.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박정희부터 전두환으로 이어져 온 군부의 독재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더욱 고취시켰고 결국 서울의 봄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에서 시민들과 학생을 위주로 대규모 시위가 펼쳐졌다. 그리하여 5월 17일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이 계엄령을 확대 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5월 18일 전국에서 시위대가 일어났다.그리고 광주. 오전부터 1980년 5월 18일 오전부터 시작된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는 이미 광주전역에 배치되어 있던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광주항쟁 최초의 유혈사태로 발전하였다. 이에 항의하는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박정희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 1979년 12월 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살 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1979년 12월 12일 10·26사태의 수사책임을 맡은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과 9사단장 노태우 소장 그리고 보안사령부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대통령의 사전재가 없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체포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12·12사태). 신군부의 실권자로 등극한 전두환은 1980년 4월 14일 국군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시대의 한 획을 그은 박정희 정권. 하지만 그 시기는 이어지는 군부정권에 의해 잊혀 졌다가 1990년대 말,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재평가 논쟁이 크게 일어났다. 박정희 시대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사회 문화적, 경제적인 암흑기를 겪는 와중에 도래했다. 이 시기는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강력했던 시기였고 그로 인한 명과 암이 극명히 갈렸다. 사회적으로는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복권과 훈장 등 국가 유공자에 대한 대우를 최초로 해 주었다. 이승만 정권에서 비하되었던 임시정부에 대한 역할을 재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박정희 정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권한이 헌법을 초월하는 장치가 있었다. 바로 ‘긴급조치’이다. 긴급조치(緊急措置)란 1972년 개헌된 대한민국의 유신 헌법 53조에 규정되어 있는 특별조치로써 대한민국 사상 대통령에게 가장 강력한 권한을 위임하였다. 이 조치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이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유신헌법 제53조에 규정되어 있는 긴급조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항.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4·19혁명을 전후하여 불기 시작한 민족주의 열기를 박정희 정권은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 교육, 문화 전반에 ‘주체적 민족사관’을 강조하고 이를 교육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1968.12.5.)하였다. ‘국민교육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방향의 정립과 시민생활의 건전한 윤리 및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60년대의 고도성장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농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부의 저곡가 정책이 계속되어 농촌은 상대적으로 낙하될 수밖에 없었다.이에 정부는 1971년 농촌사회의 소득을 올리고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북한의 천리마운동에 대항한 것으로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초가집의 개량, 농촌도로의 정비, 영농기반의 조성 등 침체된 농촌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 후에는 도시까지 확대되어 총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