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총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평화민주당(김대중), 통일민주당(김영삼), 민주공화당(김종필) 등 야당이 여당인 민정당을 누르고 다수 의석을 차지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들 삼김은 출신지역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지역당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1988년 11월 여소야대 국회에서 ‘청문회법’을 신설하여 ‘광주학살’ 등을 중심으로 전두환 부부와 친인척의 뇌물수수 등 5공화국의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나는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치면서 국민 여러분의 심판을 기다리겠다.”고 말한 후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한다.(1988.11.23.)

1990년 1월 22일 강력한 야당에 끌려가던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시민주공화당과 손잡고 3당 통합을 선언하며 민주자유당을 창립하였다. 이로 인해 여소야대 체제가 무너지고 제1야당으로 강세를 보였던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약세로 돌아서게 된다. 이에 평화민주당은 재야와 손잡고 민자당의 해체를 주장하고 나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고 김영삼은 통합여당의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된다. 

그러나 1992년 치러진 제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 149석, 민주당 97석, 국민당 331석, 신정당 1석, 무소속 21석이라는 결과가 나와 3당을 합당한 민자당에게는 초라한 성적표가 되었다. 특히 1988년 13대에 이어 다시 의석수에서 집권여당이 과반수에서 1석이 미달되는 결과로 마무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1992년 12월 여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보수정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7·7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남북한 관계를 동반 관계, 나아가 함께 번영해야 할 민족공동체 관계로 규정하였으며 헝가리, 폴란드,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권과의 경제 교류 및 수교 등 북방 정책을 추진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1989년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 아래 과도적인 통일 체제로 남북연합을 구성하여 남북평의회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민주공화국을 구성하자는 제안을 하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도 수립하였다. 

1991년 9월에는 유엔에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1991년 12월에는 상호 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하고 교류와 협력을 하며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또한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 되기도 하였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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