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9 지속된 군사독재에 강렬해진 민주화에 대한 열망, 5·18 민주화 운동 [키워드 한국사]
EP.219 지속된 군사독재에 강렬해진 민주화에 대한 열망, 5·18 민주화 운동 [키워드 한국사]
  • 보도본부 | 이호 기자
  • 승인 2019.01.27 17: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박정희부터 전두환으로 이어져 온 군부의 독재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더욱 고취시켰고 결국 서울의 봄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에서 시민들과 학생을 위주로 대규모 시위가 펼쳐졌다. 그리하여 5월 17일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이 계엄령을 확대 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5월 18일 전국에서 시위대가 일어났다.

그리고 광주. 오전부터 1980년 5월 18일 오전부터 시작된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는 이미 광주전역에 배치되어 있던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광주항쟁 최초의 유혈사태로 발전하였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과 학생들이 도청이 있는 금남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는데 공수부대가 발포함에 따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진압이 되고 만다.  

계엄군의 폭력적인 과잉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시내 전체는 학생을 주축으로 하는 시위대와 계엄군 간의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시민들의 시위대 참여가 느는 만큼 계엄군도 공수특전단을 추가배치하는 등 점점 규모가 커져갔다. 

5월 20일,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과 도처에서 발생하 유혈사태로 인해 격노한 광주지역의 거의 모든 계층들은 이제 자위적 차원에서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200여 대의 영업용 택시가 차량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런 광주 사태에 대해서 침묵을 일관하고 있던 광주 MBC가 불탔고 KBS는 자체적으로 방송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결국 시위대는 광주시청을 점령함으로써 광주사태는 서서히 시민군의 우세로 기울어졌다. 

광주의 민주화 운동은 목포, 해남, 강진, 장흥, 무안, 영암, 나주, 화순, 함평 등지로 확산되었으며 계엄군의 발포에 대응하여 시위대는 경찰서를 습격하여 자위용 무장을 시작하였다. 광주시청에 이어 전남도청도 시위대에 의해 장악되고 계엄군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광주는 완전히 관주민중의 자율적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시 외곽 7개 지점에서 광주출입을 전면 봉쇄하였으며 시외전화까지 완전히 두절시켜 외부와 완전한 차단을 시켜버렸다. 

광주시민들이 무기를 자진 반납한다는 내용으로 적극적인 협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거듭된 지원에 힘입어 신군부는 광주사태에 대한 물리적, 군사적 진압을 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시켰고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을 광주에 재진입시켜 시민군을 일방적으로 진압함으로써 광주사태를 강제로 종료시켜버렸다. 

광주 민중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안정을 위해 법적, 제도적 정비를 위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와 상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미국 카터 대통령은 ‘인권외교’를 주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보위 설치 다음날인 6월 1일 “대한공약은 확고하며 인권을 이유로 동맹을 깰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신군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