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지역을 넘어 전 세계 각계각층에서 존경받는 사람들. 그런 역량을 갖춘 인재이자 국가나 기업을 ‘글로벌 리더’라고 부른다. 역사 속 그리고 현재의 시대를 이끌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그들의 삶의 기록과 가치관 등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영문학의 본고장 영국에서 또 한 번의 ‘경계의 목소리’가 주목받고 있다. 장편소설 플래시라이트(Flashlight)로 올해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작가 수전 최(Susan Choi). ‘첫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수식보다 먼저 주목할 점은, 그가 문학으로 탐색해온 인간의 근원적 질문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 속에서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내는가’이다.

장편 '플래시라이트'(Flashlight)로 영국 권위의 문학상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작가 수전 최가 9일(현지시간)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북토크 행사에서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장편 '플래시라이트'(Flashlight)로 영국 권위의 문학상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작가 수전 최가 9일(현지시간)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북토크 행사에서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짐승 같은 현실 속,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수전 최는 1969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났다. 한국의 대표 문학평론가 최재서의 손녀이자, 6·25전쟁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수학자 최창의 딸이다. 그의 성장 배경에는 늘 “국경을 넘어야만 했던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아버지는 한국의 유복한 가정을 떠나 트렁크 하나로 미국에 왔다. 이름과 언어, 존재의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고 회상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세계에 ‘경계’와 ‘변이’를 중심축으로 세운 근원이 되었다.

‘플래시라이트’가 비춘 어둠의 서사

이번 부커상 후보작 플래시라이트는 재일교포 석과 미국인 아내 앤, 그리고 딸 루이자의 3대에 걸친 시간을 따라간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이동, 전쟁과 기억의 틈 사이에서 인물들은 ‘외부의 힘’에 휘말려 자신의 삶을 재정의한다. 수전 최는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언제나 개인의 의지로는 바꿀 수 없는 외부 상황, 특히 지정학적 사건에 의해 인생이 형성되는 순간들”이라며 “그건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고 밝혔다.

작품 속에는 한반도의 분단, 재일동포의 정체성, 북한의 폐쇄적 현실 등 동아시아 현대사가 서구의 시선 속으로 들어온다. 그는 “북한은 정보가 철저히 통제된 곳이라 신뢰할 만한 자료를 찾는 게 가장 어려웠다”며 “그래서 탈북민의 1인칭 증언을 최대한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영국 권위의 문학상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들이 9일(현지시간) 런던 사우스뱅크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사회자와 대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영국 권위의 문학상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들이 9일(현지시간) 런던 사우스뱅크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사회자와 대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플래시라이트는 본래 2020년 뉴요커에 실린 단편에서 출발했다. 일본에서 아버지가 실종된 뒤 트라우마를 겪는 소녀 루이자의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한 것이다. “처음엔 그 재앙 자체를 쓸 수 없었다. 너무 큰 벽이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을 겪은 소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다.” 그의 말처럼, 이 소설은 ‘사건’보다 ‘기억의 잔향’을 좇는다.

문학으로 경계를 건너다

수전 최는 예일대와 코넬대 대학원을 거쳐 현재 존스홉킨스대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2003년 미국 여자(American Woman)로 퓰리처상 최종 후보, 2009년 요주의 인물(A Person of Interest)로 펜/포크너상 후보에 올랐으며, 2019년 신뢰 수업(Trust Exercise)으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플래시라이트는 그의 여섯 번째 장편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출간된 영어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올해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그는 “내 작품을 직접 읽은 독자와 마주하는 건 여전히 놀랍고 마법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첫 출간 때보다 지금이 더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엔 “그때의 고통을 또 겪는다고 생각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웃었다.

장편 '플래시라이트'(Flashlight)로 영국 권위의 문학상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작가 수전 최가 9일(현지시간) 주영한국문화원에서 북토크 행사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장편 '플래시라이트'(Flashlight)로 영국 권위의 문학상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 작가 수전 최가 9일(현지시간) 주영한국문화원에서 북토크 행사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경계인’이 쓴 세계의 이야기

수전 최의 문학은 스스로를 ‘미국 작가’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그는 재일동포, 분단, 전쟁, 이주, 정체성 같은 복합적 층위를 통해 인간이 ‘국가’와 ‘언어’라는 틀 안에서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단지 한국계 작가의 자전적 서사가 아니라, 오늘날 세계가 맞닥뜨린 ‘불확실성의 정체성’을 비추는 문학적 반사경이다.

그가 말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책을 시작한다”는 고백은 어쩌면 그의 문학과 인생을 동시에 설명한다. 플래시라이트의 불빛은 한 가족의 이야기이자, 경계 위의 모든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 빛이 머문 자리에서, 우리는 여전히 ‘누가 나를 규정하는가’를 묻게 된다.
 

시선뉴스=심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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