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와 공격을 피하기 위해 광복이 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끊임없이 청사를 옮기며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다. 임시정부는 원년(1919)년에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충칭(1940) 등지로 청사를 옮겨야 했다. 

임시정부는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어 군자금 모집하거나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정부문서를 국내에 전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인물 발굴과 무기를 몰래 수송하는 등의 활동도 교통국이 하는 임무였다. 

또한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임시정부와 국내와의 비밀연락망 조직)를 실시하여 법령 및 공문을 전달 및 선포하고 독립군을 모집하거나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재정은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했지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공채를 성공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아일랜드와의 500만 달러의 공채를 성공시키는 쾌거를 거뒀으며 후에는 청일 전쟁을 앞두고 있던 공동의 적을 가진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홍보하기 위해 독립신문, 신대한보, 신한청년보, 공보 등을 간행하였고 역사문제도 심각하게 여겨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 9월에 전4권의 ‘한일관계사료’를 편찬해 낸다. 또한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하였다. 또한 대외용으로는 미국에서 ‘Korea Review’를,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기도 했다. 

외교활동으로는 초창기에는 대미외교를 중점으로 하여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소앙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리는 등 1928년까지 활동하였다. 

반면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뤘다. 당시 중국 국민당이 중국을 침략한 일본과 각을 세우기 있었기 때문에 이봉창과 안중근의 의거는 그들에게 큰 감명을 줄 수 있었다. 이때부터 장제스는 수시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원금을 보내곤 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와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 김원봉에게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고 카이로 회담 전에는 임시정부의 요인들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으며 실제로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1943년 카이로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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