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정혜인 기자ㅣ10월 9일 한글날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이 반포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한 국경일이다. 어두웠던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한글날을 제정했다. 힘든 시기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무수한 독립운동가 중 ‘윤동주’는 글로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남겼다.

윤동주 [사진/위키피디아]
윤동주 [사진/위키피디아]

지금의 윤동주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엄연한 독립운동가였다. 1917년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당시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었다. 문익환 목사도 명동촌에서 윤동주와 함께 자랐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 전 이곳에서 사격 연습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동주는 어렸을 때부터 사촌인 송몽규와 가깝게 지냈다. 둘은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발행되던 잡지들을 구독하며 문학에 관심을 가지다가 직접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기도 했고, 『새 명동』에는 명동학교에 대한 내용과 학생들의 문예 작품, 명동촌의 소식 등이 실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간본 [사진/위키미디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간본 [사진/위키미디어]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고향을 떠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숭실중학교로 편입하게 된다. 그러나 숭실중학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를 숭실중학교 학생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숭실중학교는 무제한 쉬게 되었고, 윤동주도 친구들과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 졸업했고, 광명중학에 재학하던 2년 동안 윤동주는 동시에 더욱 몰두하여 연길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가톨릭소년』에 모두 5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이후 1938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입학했다.

윤동주의 마지막 고향 방문 사진 [사진/위키미디어]
윤동주의 마지막 고향 방문 사진 [사진/위키미디어]

윤동주가 광명중학을 졸업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과에 진학하길 원했다. 그렇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와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는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양하 교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면서는 자신의 문학 세계관을 확장해 나갔다.

1938년은 중‧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제가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던 해였다. 그래서 그는 2학년 때부터 동시 쓰기를 그만두었다. 1939년에 윤동주가 쓴 ‘자화상’과 ‘투르게네프 언덕’에는 나라를 잃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1940년 12월까지 1년 이상 절필을 했다.

1941년, 졸업반이 된 윤동주는 시를 쓰는 데 몰두하며 지냈다. 이 한 해 동안 ‘무서운 시간’, ‘십자가’, ‘돌아와 보는 밤’, ‘별 헤는 밤’ 등의 시들이 탄생했다. 그는 자신이 작성한 시 18편을 추리고, 앞에 ‘서시’를 붙여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었다.

윤동주의 묘비 [사진/위키미디어]
윤동주의 묘비 [사진/위키미디어]

졸업 후 일본 유학길에 떠났던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던 중 일본 형사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는 교도소에서 이른바 ‘생체 실험’을 당하다 1945년 2월 16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시들이 지금까지 남아 당시의 먹먹함을 느끼게 해준다. 한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하는 오늘, 우리에게 아름다운 시와 독립의 정신을 남기고 간 윤동주를 다시금 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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