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지역을 넘어 전 세계 각계각층에서 존경받는 사람들. 그런 역량을 갖춘 인재이자 국가나 기업을 ‘글로벌 리더’라고 부른다. 역사 속 그리고 현재의 시대를 이끌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그들의 삶의 기록과 가치관 등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시선뉴스=양원민 기자ㅣ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회사 디즈니가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이를 맞아 장편 애니메이션 ‘위시’(Wish)를 개봉했고 여러 시상식에서 후보에 오르며 여전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 최초의 미키 마우스의 저작권이 만료되면서, 미키 마우스를 이용한 공포물이 나오는 등 세계 각종 이슈에도 등장하는 월트 디즈니사. 장편 애니메이션계의 최강자인 월트 디즈니를 설립한 ‘월트 디즈니’를 조명해 본다.

월트 디즈니의 생애

월트 디즈니[사진/wikimedia]
월트 디즈니[사진/wikimedia]

월트 디즈니는 1901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아버지와 함께 이사를 거듭하며 미국의 각지에 살았고, 그가 4살이던 무렵 미주리주 마셀린이라는 농촌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재능을 보였는데, 냉담한 아버지 대신 옆집에 살던 은퇴한 의사가 그의 그림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볼만큼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 월트 디즈니의 형이자 동업자였던 로이 디즈니에 따르면 이 의사의 격려가 월트 디즈니의 인생에서 최초로 느낀 기쁨이었다고 한다.

월트는 16세 무렵 군대에 간 형들을 생각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해군에 지원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 입대하지 못했는데, 친구로부터 1900년생까지 받아준다는 적십자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생년월일을 고쳐 들어갔다.

적십자사에 있으면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렸던 월트는 1919년 본격적으로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해 캔자스로 갔다. 그는 광고용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인형을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1분짜리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래프 오 그램(Laugh-O-Gram)
월트는 집의 차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다니던 회사의 카메라를 빌려다가 영화적인 기교를 익혔고, 동료들과 함께 미술학원에 다니며 드로잉 수업을 들었다. 월트는 <래프 오 그램>(Laugh-O-Gram)이라고 이름 지은 1분짜리 애니메이션 필름 릴을 회사 동료들과 만들어 한 극장에 찾아갔다. <래프 오 그램>은 그 당시 사회 문제들을 풍자한 짧은 만화로 신문에 연재되는 풍자만화들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다. 월트의 작품을 본 극장의 사장은 1분의 시사를 마친 뒤 필름을 사고 월트와 시리즈 계약을 맺었다. 훗날 월트는 자신의 작품명을 따 래프 오 그램 필름사를 설립하고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그 회사의 사장이 됐다.

디즈니 스튜디오의 첫 간판

월트 디즈니[사진/위키백과]
월트 디즈니[사진/위키백과]

회사는 재정적인 문제로 운영이 쉽지 않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형과 함께 만든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필름을 가지고 여러 스튜디오의 문을 두드렸다. 여러 스튜디오에서 냉대한 반응이 이어지던 중 할리우드 역사상 최초의 여성 배급자인 마거릿 윈클러가 월트 디즈니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월트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보자마자 시리즈의 성공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시리즈 배급계약을 제의했다. 이러한 일이 워너브라더스에도 알려지며 그렇게 월트 디즈니의 작품이 워너브라더스를 통해 배급되기 시작했다.

이후 1923년 10월 형 로이 디즈니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첫 간판을 달았다.

미키 마우스의 탄생

PLANE CRAZY 포스터[사진/위키백과]
PLANE CRAZY 포스터[사진/위키백과]

그렇게 월트는 열정 가득히 연재하던 중 배급업자가 마거릿 윈클러의 남편인 찰스 민츠로 바뀌며 위기를 맞았다. 당시 생명력을 잃어가던 앨리스 시리즈를 중단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 시리즈 중 한 캐릭터였던 ‘행복의 토끼 오스왈드’를 전면에 내세운 시리즈가 다시 기획됐다. 하지만 이후 찰스 민츠와 갈등을 빚다 결국 오스왈드 캐릭터를 빼앗겼다.

재정적 궁핍으로 법적인 소송을 할 여력도 없던 월트는 뉴욕에서 돌아오는 길에 짧은 시나리오 한 편을 썼다.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이야기에서 따와 <Plane Crazy>(미친 비행기)를 썼고, 주인공은 쥐였다. 이 수컷 쥐는 기존의 오스왈드와 비슷하게 생겼었는데, 동료와 가족들의 피드백을 통해 귀를 줄이고 코를 통통하게 그려 ‘미키’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이 것이 바로 최초의 미키 마우스가 탄생한 순간이다.

월트 디즈니는 <미친 비행기>의 시사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깔아 상영했고 많은 관객이 작품에 열광하며 환호했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월트는 기존의 무성영화에 소리를 입힐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그는 1928년 미키 마우스에 목소리를 입혀 ‘Steamboat Willie’(증기선 윌리)를 공개했고, 폭발적인 관객들의 반응을 얻었다. 또 뉴욕타임즈에 작품에 대한 긍정적 기사가 실리며 성공 가도를 걷기 시작했고, 이후 도널드 덕, 플루토, 구피 등의 후속 캐릭터를 선보이며 디즈니 세계를 구축해 갔다.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사진/위키백과]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사진/위키백과]

디즈니는 193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제작해 당대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은 장편 영화 상영 도중 틀어주는 소품 같은 개념이었기에, 그 누구도 한 시간 넘게 상영되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극장에 앉아 감상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월트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은 무모하다고 여겨졌지만, 결국 모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대성공을 거뒀다. 그렇게 애니메이션 산업은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상업적인 성공으로 실사영화 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고, 당당히 한 장르를 차지하게 됐다.

디즈니의 전성기
여세를 몰아 월트 디즈니는 3년여 동안의 제작 기간을 통해 <판타지아>(1940)를 공개해 애니메이션이 아동들만의 것이라는 편견을 깨며 애니메이션 장르의 지변을 넓혔다. 연이어 <피노키오>(1940)와 <아기코끼리 덤보>(1941)를 공개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수익을 올렸다.

1950년대에 들어서는 <신데렐라>(195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 <피터 팬>(1953) 등을 잇달아 극장가에 내걸었다. 또 줄리 앤드루스 주연의 극영화 <메리 포핀스>(1964)까지 대박이 나 디즈니사의 전성기가 도래했다.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디즈니랜드’

캘리포니아의 디즈니랜드[사진/flickr]
캘리포니아의 디즈니랜드[사진/flickr]

애니메이션으로 성공하고 세계관을 구축한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랜드’로 또다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얻으며 어린이들이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만나 함께 놀고 사진도 찍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오면서부터 이러한 구상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1955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서부 애너하임에 개장했다.

이제는 애니메이션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브랜드 ‘월트 디즈니’. 새로운 문화 장르를 개척했고, 꿈을 현실로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며 디즈니랜드까지 건설한 월트 디즈니는 1966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도 월트 디즈니사는 여러 변화를 거듭하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고의 콘텐츠 그룹으로 우뚝 서 있다. 디즈니는 여전히 방대한 캐릭터와 세계관으로 어린이들에게는 동심을, 어른들에게는 향수를 심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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