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지역을 넘어 전 세계 각계각층에서 존경받는 사람들. 그런 역량을 갖춘 인재이자 국가나 기업을 ‘글로벌 리더’라고 부른다. 역사 속 그리고 현재의 시대를 이끌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그들의 삶의 기록과 가치관 등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시선뉴스=정혜인 기자ㅣ2000년, 소프라노 성악가 조수미와 함께 내한공연을 가지며 한국인들에게 인지도를 높였던 안드레아 보첼리. 뛰어난 가창력과 세계적인 명성으로 보았을 때 평생 음악만 했을 것 같지만, 그는 한때 변호사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팝페라 가수로 성공을 거두기까지 보첼리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음악’과 ‘시력 장애’

[사진/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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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보첼리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과 가까이 지냈다.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이후 플루트, 색소폰, 트럼펫, 기타 등도 배웠다. 그는 원래 선천적으로 녹내장을 앓고 있었는데, 12살쯤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게 된다. 이때 보첼리는 축구 시합에서 골키퍼로 나섰다가 눈에 공을 맞았고, 머리에 충격을 받아 내출혈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점차 시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살았고, 14살 때에는 노래 경연 대회에서 ‘O sole mio’를 불러 우승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배운 음악
보첼리는 점자책으로 법학을 공부해 피사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수년간 법정 선임변호사로 일했다. 그렇지만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변호사 일을 그만두었고, 이후 그는 야간 재즈바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레슨비를 벌며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동시에 명테너 프랑코 코렐리에게 성악 코칭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1992년, 이탈리아의 팝스타 주케로와 ‘Miserere’라는 곡을 부르면서 유명세를 쌓다 2년 뒤, 산레모가요제에서 ‘Il mare calmo della sera’로 신인상을 받았다. 같은 제목의 데뷔 앨범은 당시 이탈리아 톱 10에 올랐다.

사라 브라이트만과 듀엣

[사진/위키피디아]

다가온 1996년과 1997년은 그의 전성기였다. 보첼리의 데뷔 앨범 ‘Romanza’는 각종 앨범 차트를 휩쓸었는데, 사라 브라이트만과 듀엣곡 ‘Time to Say Goodbye’를 통해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이름을 알렸다. 그의 곡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수많은 플래티넘과 멀티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1997년에는 ECHO ‘올해의 최고 싱글곡’, 1998년에는 세계 음악 ‘최고 이탈리아 가수’, 1999년에는 골든 글로브에서 수상하는 등 90년대 후반 다수의 음악상을 거머쥐었다. 또 1998년,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오르며 그의 위상을 입증받았다.

새로운 장르 ‘팝페라’

[사진/위키미디아]

팝과 오페라를 융합한 ‘팝페라’. 보첼리는 여러 장의 솔로 음반을 내며 팝페라계 거장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정통 클래식 공연도 꾸준히 이어갔는데, 2000년대 이후부터는 쉬지 않고 음악 활동을 했다. 오페라 ‘라보엠’, ‘토스카’도 녹음했고,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핑커톤’ 역을 맡기도 했다. 그의 아들 역시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갖추고 있어 2018년에는 아들과 함께 듀엣곡 ‘Fall On Me’를 발표했다. 이 곡이 실린 앨범은 보첼리에게 생애 첫 빌보드 200 1위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해당 앨범에는 두아 리파, 에드 시런도 피처링으로 참여해 이탈리아어로 노래했다.

보첼리의 곡들은 우리나라 곳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개그나 교양 프로그램에서 BGM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고, 격투기 경기에서 추성훈 선수 등장 시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다. 고려대학교의 응원가 ‘민족의 아리아’도 보첼리의 ‘Melodramma’를 원곡으로 한다. 이렇게 그의 음악이 다양하게 쓰인 건 풍부한 성량과 감정선 덕분이다. 앞으로도 섬세한 감동을 주는 보첼리의 음악을 오랫동안 만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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