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양원민 기자ㅣ지난주, 우리나라의 독립을 전 세계에 선언했던 3월 1일이 지나갔다. 삼일절은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부터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념했던 날로, 우리나라 5대 국경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대한민국 민족은 각자의 방식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했다. 누군가는 무장 투쟁을, 누군가는 예술을 통해 그 마음을 나타냈다. 국가보훈부에서 운영하는 공훈전자사료관에서는 매달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2024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조명해본다.

첫 번째, 이사벨라 멘지스(1856~1935)

사진/국가보훈부
사진/국가보훈부

이사벨라 멘지스는 1856년 호주 빅토리아주의 발라랏에서 태어났다. 엘라드 스트릿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사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해당 지역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와 호주장로회 여전도회연합회 에벤에셀 지부 총무로 일하던 그는, 한국에 파송할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해 1891년 9월 부산 지역에 파견됐다.

멘지스 선교사는 주로 어린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1893년엔 미오라고아원을 설립, 운영했고, 1895년엔 여학교를 설립했으며 이는 이 지역 여성교육의 명문인 일신여학교로 발전했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던 무렵 교내에서도 해방운동 물결이 이는 것을 알고 있었고, 태극기를 만들 깃대를 제공, 태극기 보관 등에 도움을 줬다. 3월 11일 저녁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일으키자 기숙사를 지키며 이들을 보호했다.

이후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취조와 심문을 받았으나 영국 영사관을 개입으로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건강과 가정 사정으로 190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가도 1912년 다시 내한하였고, 1924년 은퇴할 때까지 독신으로 지내며 부산 지역의 복음 전도와 교육 사업, 자선사업에 헌신하였다.

두 번째, 마가렛 데이비스(1887~1963)

사진/국가보훈부
사진/국가보훈부

마가렛 데이비스는 1887년 호주 빅토리아주에서 태어났다. 멜버른에서 기독교 대학인 장로회여자대학을 졸업했고, 멜버른 대학 문학부에서 공부하며 해당 대학 부속 사범과에서 학위를 받았다. 1910년 10월 호주장로회 여선교사회연합회의 선교사로 파송 받아 내한했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일신여학교 교장이었던 데이비스는 같은 학교에 교사로 있던 여선교사 호킹과 함께 학생들을 보호·귀가시키기 위해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이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집으로 찾아온 6명의 순경에게 체포되어 부산경찰서에서 구금·취조를 받았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기독교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호주 장로회는 신사참배를 강요받는 학교를 경영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이에 데이비스는 1940년까지 부산 동래에서 일신여학교 교장과 교육선교사로 활동하다 귀국하였다.

세 번째, 데이지 호킹(1888~1971)

사진/국가보훈부
사진/국가보훈부

데이지 호킹은 1888년 호주 벨라린에서 태어났다. 26살 무렵이던 1914년 한국선교사로 승인된 후 디커니스 훈련소에서 18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1916년 3월 내한했다. 부산에서 여성 교육과 전도를 도맡았고, 어린이 성경학교와 타종교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주일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3월 무렵 일신여학교 교사였던 호킹은 3·1운동이 발발하자 교장이던 데이비스와 함께 아이들을 보호·귀가시키기 위해 찾아 나섰고, 시위 선동 등의 혐으로 체포되었다. 일제측 자료에 따르면 “데이지 호킹과 교장 마가렛 데이비스는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당시 데이지 호킹은 학생들에게 시위를 권유하며 함께 행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영국 영사관의 개입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부터 경남지역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후원했으나, 1941년 영일 관계 악화와 영국영사관의 권고로 귀국하였다. 1919년 3월 11일 저녁 9시경 일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주동이 된 만세 시위는 경남지역 3·1운동의 도화선이었다. 이러한 일신여학교의 3·1운동에서 교장과 교사였던 선교사들은 학생들의 만세 시위를 우려하면서도 태극기 제작 준비를 도왔고, 시위 당시 학생들을 보호했다.

나라를 사랑하고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한 유공자들과 이를 돕던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을 수 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매해 삼일절엔 정부에서 애국지사, 독립유공자 가족 등을 초청해 기념식을 거행하며, 각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 광경의 재현과 같은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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