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심재민 기자 | "한 번 칼을 뽑으면 만인이 다투어 도망가고 활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했다" 고려 시대 현종이 높이 평가한 ‘양규’ 장군이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주목을 받으면서 동시에 화제가 되고 있다.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관용의 리더십으로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황제 현종과 그의 정치 스승이자 고려군 총사령관이었던 강감찬의 이야기를 그린다. 극 초반 처절한 전투를 지휘하는 장면이 몰입도를 끌어 올렸는데, 당시 장면의 주인공인 ‘양규’ 장군이 ‘리더십’의 중요성과 함께 화제가 되고 있다.

양규는 고려의 장군으로 거란의 제2차 침략(1010~1011) 때 흥화진을 지켜내고 곽주·무로대·이수·석령·여리참 등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여 많은 포로를 구출하고 고려를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의 활약이 눈이 부셨는데, 실제 고려사 열전 제 7권 양규 편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양규는 드라마 못지 않은 실제 활약을 통해 멸망의 위기 속에서 납치된 백성을 구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양규의 역사적 기록은 출신과 생년은 확인할 수 없고, 1010년(현종 1)부터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전기까지 군 지휘관은 대부분 문신(文臣)이었다는 점에서 문신 출신으로 추정되는 양규 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상대로 큰 공을 세웠다.

때는 1010년 11월, 거란의 황제가 고려를 직접 공격하며 거란의 제2차 침략이 발발했다. 당시 거란은 다양한 수법과 압박으로 고려에 항복을 권유했으나, 당시 양규는 ‘나는 왕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며 굴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자 거란은 12월 곽주(평안북도 곽산군)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대규모 군사를 주둔시켰다. 고려에게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이 소식을 접한 양규는 흥화진에서 군사 700명을 이끌고 통주로 이동하여 패잔병을 1,000명을 수습하였다. 야심한 밤을 타 곽주로 이동하여 그곳을 지키던 거란군을 급습해 승리를 거두었고, 남녀 7,000여 명을 구출하여 통주로 옮기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 영웅의 면모를 보였다.

양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란의 만행은 끝나지 않았고, 고려의 왕 현종은 강감찬의 권유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떠난 상황을 노려 개경(개성)에 입성하여 굴궐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양규는 군대를 이끌고 철군하는 거란군을 습격, 수많은 피해를 입히고 대규모의 포로를 되찾은 등의 공을 세웠다. 하지만, 곧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규모를 이용해 압박 공격을 해왔고, 이에 맞서 양규는 끝까지 싸웠으나 결국 규모에 밀려 전사하고 만다. 이러한 양규의 희생에 힘입어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는 거란군을 공격, 크게 승리하고 잃었던 성을 모두 수복하는 결과를 맞이한다.

양규에 대한 높은 평가는 어려운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꿋꿋이 싸워 적은 수의 군대로 좋은 성과를 내고 전투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기에 합당하다. 특히 고립된 군대를 이끌며 약 한 달 동안 거란군과 7번 싸워 수많은 거란군을 죽이고, 다량의 무기를 역으로 거두었으며, 포로가 된 백성 3만여명을 되찾았아 그야말로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처럼 거란의 제2차 침략에서 고려가 승리를 거두는 데 큰 공을 세운 양규. 이에 고려 현종은 1011년 2월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4월에는 양규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 평생토록 곡식 100섬을 내리고 아들 양대춘(楊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양규의 공을 기리기 위한 많은 절차기 진행되었고, 한국 역사상 훌륭한 리더십과 역경을 극복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