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서울 중구)ㅣ근대에 지어져 서양식 건물인 양관(洋館)이 여러 채 도입된 덕수궁. 이곳은 본래 월산대군의 집터였으나 임진왜란 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며 정릉동 행궁으로 불렸다. 광해군 때에는 또 경운궁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다 고종이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로 다시 ‘덕수궁’(德壽宮)이 되었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월산대군의 집터였을 때의 덕수궁은 ‘궁’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되었다. 그래서 덕수궁은 기존 궁들과는 다르게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자, 그제서야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덕수궁에는 고종이 일제의 압박으로 양위를 강요당한 흔적이 묻어있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했다. 함녕전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1897년(광무 1)에 건축되어 1904년(광무 8)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8월에 중건되었다. 함녕전의 ‘함녕’(咸寧)은 ‘모두가 평안하다’라는 의미로, 국가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조선 후기 마지막 왕실 침전 건물이기에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덕수궁의 전각인 석조전(石造殿)은 대한제국 말기에 건립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으로, 영국인 존 레지날드 하딩이 설계를 맡았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건축물을 모방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석조전은 정갈한 좌우대칭, 엄격한 비례와 균형 등이 특징으로 대칭의 조화와 질서를 추구한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석조전은 일제가 추진한 덕수궁 일대의 공원화 사업 시기에 미술관으로 쓰였다. 광복 직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담 장소와 UN 한국임시위원회 사무실 등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950년대에는 다시 국립박물관과 미술관으로, 1973년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실로, 1992년 이후에는 문화재청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여 조선 왕실의 문화재 및 궁중 유물을 전시·관리했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지식교양 전문채널-시선뉴스

‘덕수궁’ 하면 석조전만큼 돌담길 산책로도 유명하다. 예전에는 돌담길을 연인이 끝까지 걸으면 헤어진다는 설도 있었다. 아마도 과거 이혼 절차를 밟는 부부가 서울가정법원으로 가는 길목이 이 길이었기에 이런 설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덕수궁 인근에는 정동길, 덕수궁길 등 산책하기 좋은 곳도 많다. 한국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오묘한 분위기와 역사적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한 번쯤 덕수궁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진 ‘정서윤’님께서 제공해주셨습니다.

*시선뉴스에서는 여러분의 아름다운 사진을 제공받고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