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한지윤 에디터] 최근 극장가에 한국 영화들의 훈풍이 불고 있다. 특히 8월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영화들이 많이 개봉하는데, 올해는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가 개봉해 큰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덕혜옹주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덕혜옹주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의 마지막 황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시기 나라를 일본에 강제 합병한 을사오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완용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완용을 포함한 을사오적에는 누가 있었으며 그들의 행적은 무엇일까?

1905년 일본이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는 당시 협약에 서명을 한 5명의 대신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 을사오적

을사오적은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나 명예직을 받아 일제강점기에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이완용이다. 그는 을사조약 체결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승진을 거듭했으며 한일병합조약에 조인을 한 공로로 백작 작위와 거액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박제순도 한일병합조약에 서명을 했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해에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일제로부터 수당도 챙겼다.

이근택은 을사조약 체결공로로 훈장을 받았으며 그의 형제들은 한일병합 이후에 작위를 받은 ‘귀족집안’으로 유명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자격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험해지지만 결국 치료를 받아서 살아난다.

다른 을사오적들과 마찬가지로 풍요롭게 살던 이지용은 돈을 주고 진주의 기생 산홍을 첩으로 사려고 했다. 산홍은 이지용에게 역적의 첩이 될 순 없다며 이지용을 꾸짖어 당시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었다.

마지막으로 개화파 정치인이었던 권중현은 을사조약 사건이 있기 전에 친일파로 변절했다. 을사오적이 된 이후 암살단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은 적이 있지만 의병운동을 탄압하고 친일단체를 후원하는 등 평생 친일파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고종 황제는 을사조약이 불평등 조약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광복 이후로도 20년이나 지난 1965년에 이르러서야 무효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을사조약의 치욕과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킨 을사오적에 대해 제대로 알고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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