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정혜인 기자 | 김성수 감독의 새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6일 만에 누적 관객 수 2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올해 나온 영화 중 ‘범죄도시 3’에 이어 두 번째로 빠른 속도이다. 앞서 ‘범죄도시 3’은 지난 6월 개봉 4일째에 200만 명을 돌파한 바 있다. 2023년 11월 29일 뜨거운 이슈 <‘서울의 봄’ 흥행과 12.12 군사반란>에 대해 팩트와 함께 전달한다.

#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서울의 봄’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린 작품이다. 제작에는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을 만든 하이브 미디어코프가, 감독 자리에는 ‘아수라’, ‘감기’, ‘태양은 없다’, ‘비트’ 등을 제작한 김성수 감독이 이름을 올렸다.

‘서울의 봄’은 박 대통령 암살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시작한다. 국방안보사령관 전두광(배우 황정민)과 그를 따르는 민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수도방위사령관 이태신(배우 정우성)이 전두광에 맞서 싸운다. 이 둘의 충돌은 점점 격화되고, 두 세력의 팽팽한 대립이 펼쳐진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서울의 봄’이 갖는 의미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하고 한국에는 잠시 민주화의 희망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는 5.18 민주화운동이 신군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면서 끝나게 된다. ‘서울의 봄’이라는 말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표현이다. 프라하의 봄처럼 서울의 봄도 7개월을 채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 ‘서울의 봄’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음에도 그때를 기억하기 위해, 또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보기 위해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고 있다. 역사에서 암울한 시기를 다루었지만, 각 장면에서의 완급조절이 적절해 지루할 틈이 없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 역사적 사실 1 _ ‘10.26 사건’부터 ‘12.12 군사반란’까지
서울의 봄을 기대하게 된 건 1979년 10월 26일, 약 18년간 장기 집권한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당하면서부터였다. 이때 사람들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목소리를 외쳤다.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최규하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최규하는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에서 일단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민주헌법으로 개정 후 다시 선거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곧 전두환 중심의 군부세력(신군부)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는 최규하의 재가도 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했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했다. 10·26사태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신군부와 정승화 세력이 크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이미 전두환 합수부장의 지시 아래 육군본부와 국방부가 점령당한 상황이기도 했기에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이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하게 된다. 이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 쿠데타까지 주도하는 중심세력이 된다.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사진/위키피디아]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사진/위키피디아]

# 역사적 사실 2 _ 5.18 민주화운동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했고, 반란군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켰다. 계엄령과 대학교들의 겨울방학이 있었기에 1980년 4월 이후부터 전국에서는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이어졌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광주시에서는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계엄군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한 폭력은 물론, 불법 처형, 총기 사용까지 서슴지 않았다.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해 대항해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무고한 광주 시민들이 무참히 세상을 떠났고, 모두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

광주의 망월묘지공원 [사진/위키피디아]
광주의 망월묘지공원 [사진/위키피디아]

# 영화에 담긴 9시간
영화는 12.12 군사반란과 서울의 봄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기에 현실에 대한 여러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영화에 대해 ‘잘 만들어서 화나는 영화는 처음’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개봉 직후 SNS에서는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의 심박수가 얼마나 올랐는지 스마트워치를 통해 공유하는 ‘심박수 챌린지’가 생겼다.

자신의 심박수를 공유한 인증 사진들을 보면, 영화를 보는 동안 스트레스 지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 확인된다. 이를 보면, 특히 영화 후반부에 관객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관객들은 “스트레스, 누구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 “끝나고 밥 먹는 데 스트레스 받아서 밥맛 없어졌다” 등의 후기를 남겼다.

높은 관람객 평점, 7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유지하고 있는 ‘서울의 봄’. 그럼에도 다소 격한 후기들에 “내 돈 주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며 예매를 주저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 황정민·정우성의 열연, 그리고 시너지
관람객들의 호평과 영화의 흥행에는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력이 있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이 실존 인물과 배우의 일치율에 중점을 두었다면, ‘서울의 봄’은 배우 황정민과 배우 정우성의 개성을 캐릭터에 잘 녹여냈다. 그래서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상당한 몰입감과 긴장감을 선사한다.

특히 황정민은 평소 본인 머리를 좀 밀고, 특수분장으로 실제 인물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는 메인 빌런으로 과하지 않게 중심을 잘 잡았고, ‘전두광’이라는 배역에 완전히 몰입했다. 정우성 역시 각종 인터뷰에서 ‘전두광’의 기세에 감탄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서울의 봄’은 황정민과 정우성이 ‘아수라’에 이어 두 번째 인연을 이어간 작품이다. 그리고 정우성이 김성수 감독과 5번째로 협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앞서 정우성은 김성수 감독과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아수라’에서 함께했다. 이들이 다른 작품에서 맞췄던 호흡들은 지금 큰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 ‘전선을 간다’ 등 음향효과
영화 후반부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군가 ‘전선을 간다’가 흘러나온다. 이 곡은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던 1980년대 초반에 탄생한 곡이다. 김성수 감독은 훈련소 시절부터 이 곡의 ‘비장함’이 기억에 남았다고 밝혔다.

영화에 따라 관객들이 추천하는 특별관이 다른데, ‘서울의 봄’은 IMAX보다 돌비 애트모스를 권하는 이들이 많다. 돌비관은 일반관에 비해 2배 느낌의 음향 효과를 갖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관에서 보아도 몰입하게 되지만, 음향효과가 더해졌을 때 몰입감이 배가 된다고 한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40여 년 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자비한 방식으로 정권을 차지한 신군부, 그리고 이를 막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기도 한다. 과거의 일을 마음 깊이 새겨 더 이상 비극적인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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