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시선뉴스 이호기자] 고대 삼국시대는 생산량이 많지 않은 시기였다. 철제 농기구를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땅을 비옥하게 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그 와중에도 신분에 의한 빈부격차는 매우 극심해 귀족은 매우 부유했고 농민은 굶어죽거나 살기위해 노비로 들어가게 되었다. 고대 삼국시대의 귀족과 농민의 생활상, 자세하게 알아보자.

각 부의 지도자들은 다른 국가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하나로 뭉칠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해서 부족국가가 생성이 되었고 각 부의 지도자였던 사람들은 귀족이 되었다. 귀족은 자신의 소유지와 노비, 국가가 지급한 식읍과 녹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쌓으면 그에 대한 대가로 토지와 노비를 더 받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추세였다. 이렇게 쌓이는 재물은 이후 먹을 것이 곤궁한 농민 등을 상대로 하여 고리대를 통하여 재산을 증식하였고 이를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는 등 재산은 점점 더 많아졌다.

 

또한 귀족은 농민보다 비옥한 토지와 철제 농기구, 그리고 우경(소로 농사지음)을 하여 농민보다 더 많은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귀족은 농민의 수확량을 대부분 수탈하여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을 했다. 당연히 먹을 것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호화로운 저택과 말과 소 등 농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으며 비단옷을 입고 금·은·보석으로 치장하였다. 또한 고리대업을 하여 돈을 갚지 못한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더욱 더 부를 쌓는 등 농민의 등골을 빼 먹었다. 하지만 국가체제와 왕권이 강화되고 수취체제를 갖춘 이후에는 귀족의 과도한 수탈이 약화되었지만, 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지속적이고 악랄했다.

농민들 중 일부는 자기 소유지가 있는 자영농이었지만 척박한 토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척박한 토지를 개간하는 동안 귀족에게 고리대로 곡식을 꾸어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몇 년에 걸쳐 척박한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면 고리대를 갚지 못해 그 땅을 귀족에게 빼앗기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러다 보니 농민의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을 하게 되었고 이렇게 수확한 곡물의 절반을 지대로 납부해야 했다. 또한 농경지식이 전무하여 한 번 곡식을 수확한 땅은 다음 해에는 수확을 할 수 없게 되어 몇 년을 땅을 쉬게 하는 휴경 농업이 주였다. 때문에 절대적인 수확량은 매우 낮았고 그나마도 거의 다 빼앗겨 노비가 되거나 도망을 가거나 하였다.

4세기∼5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어 생산력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고 6세기경에는 철제 농기구가 보편화되었으며 소를 이용한 우경이 확대되어 농업 생산력은 증가할 수 있게 됐다.

고대 삼국시대의 농민 역사는 국가와 귀족에게 수탈당하는 역사였다. 삼국 초기에는 국가와 귀족의 수탈과 더불어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 성을 쌓는 등의 잡역부로 동원되면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삼국 분쟁기에는 군역까지 지게 되어 노동력이 부족한 바람에 농민의 부담은 이전 보다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농민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경험에 의한 농업 기술을 개발하고 황무지를 지속적으로 개간하여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극심한 가뭄 등의 자연재해와 귀족들의 살인적인 고리대로 인해 버틸 수 없는 농민들은 노비나 도적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산업화가 되기 전 까지 국가 경제의 근원이었던 농민. 가장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가난을 면치 못하고 그들로 인해 호화롭게 사치를 부린 귀족들은 농민들에 감사함을 보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도망을 가지 않고 지속적으로 세를 바칠 수 있게 할까 많은 노력을 했다. 경제 양극화는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가지고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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