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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고대 3국 시대에는 왕권보다는 여러 부 들의 권력이 강해, 중앙 집권적인 성격 보다 지방 자치적인 성격이 강했다. 당시는 국가간 잦은 영토 전쟁으로 국경(지방) 지역의 군사력이 강해야 했던 시기다. 따라서 각 부는 곧 군대였고 군사력이 권력이었기 때문에, 힘이 왕권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삼국을 통일한 최초의 국가인 통일 신라의 어떤 모습이었을까? 물론 당이 끼어들어 반쪽짜리 통일이라는 평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통일신라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통일 이후 신라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를 완성했던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수용하여 역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로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중앙 통치 조직으로는 집사부(신라의 중앙행정관청 중 하나로, 왕의 명령을 집행하고 보고하며 중요한 기밀업무 등을 수행한 기관으로 책임자는 중시, 시중으로 불렸다)의 기능을 강화하고 아래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였으며 이후 14부로 개편했다.

 

그리고 지방은 9주 5소경 제도를 도입했는데 각 주의 우두머리를 군주라 했다. 애초에 군주는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파견한 기구로 당대의 무장을 배치했었다. 하지만 통일신라 후대로 갈수록 군사적인 면은 희석시키고 행정적인 기능이 강화됐다.

5소경은 수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685년(신문왕 5년)에 새로이 정비한 특수 행정구역으로 경주가 신라 영토의 동쪽 끝에 치우쳐 있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군사와 행정상의 요지인 동, 서, 남, 북과 중앙의 방향에 맞추어 설치되었다. 지역으로는 원주, 충주, 청주, 남원, 김해로 이 지역에는 왕족과 귀족들을 내려 보내 통치하게 하여 문화 행정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며 지방의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수리 제도를 시행했는데, 지방의 토착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 귀족의 자제들을 금성에 머물게 하는 일종의 인질 제도였다. 이 외에도 반란을 일으킨 지역이나 정복한 지역에는 향, 부곡이라는 특수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외사정을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찰하는 등 지역을 견제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통일 시킨 고구려와 백제, 말갈인을 융합시키기 위한 정책도 펼쳤다. 9서당은 통일신라의 중앙군으로 왕의 직속 군대라 할 수 있었는데, 이 군대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인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지방군은 10정이 있었는데, 9주에 각 1정씩 설치하고 지역이 다른 곳보다 넓은 g나 주는 2정을 설치하여 10정을 완성했다.

이처럼 통일신라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정부를 두어 관리를 감찰했고 국학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했다. 또한 상수리 제도 등을 두어 왕권에 도전하는 것 자체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골품제도라는 신분제로 통일신라의 주요 관직에 진골 출신 인사들만 등용이 되었고 이 때문에 신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6두품들의 반발을 샀으며, 통일 신라 말에 중앙이 무너지자 지방의 군주 혹은 세력가 들이 호족으로 발전해 자체적인 힘을 키워가 이는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왕권을 강화하려 많은 노력을 했지만 왕족인 진골의 권력이 강화되고 말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만 일삼다 고인 물처럼 썩어 고려 건국의 비료가 되어버렸다.

통일신라 말기는 전형적인 기득권에 의한 권력 편중의 정치국가로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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