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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고대 삼국시대에도 현재처럼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경제활동을 활발히 했을 것이다. 과연 그 시기에는 어떤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을까?

고대국가들의 성장기에는 활발한 정복활동이 있었다. 때문에 각 부족이나 국가들은 정복 지역에서 공물을 수취하거나 전쟁 포로를 노비화하고 정복활동에 공을 세운 군공자 들에게 일정 지역의 토지와 농민을 식읍(조세를 거둬들일 수 있는 토지나 백성)으로 지급했다.

삼국이 서로에 대해 항쟁을 하던 시기에는 정복 지역에 대한 가혹한 수취가 있었다. 이에 피정복민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들 도망치자 수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었고, 이에 피정복민들이 도망치지 않게끔 지배 방식을 개선하여 차별을 줄였다.

이에 조세제도(수취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생겼는데, 재산의 정도에 따라서 호를 나누어 곡물과 포(삼베)를 징수하게 되었다.

 

수취체제는 크게 조세, 공물 등 세금을 내는 것과 역과 같이 노동력을 징수하는 것 두 가지로 나뉘어 졌다.

조세는 재산의 정도와 식구의 수를 기준으로 하여 곡물, 포, 특산물을 징수하는 것이고 역은 15세 이상의 남자의 노동력을 징발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성을 짓는 국책 사업 등의 노동력이 필요한 곳에 쓰였다.

그리고 고대 삼국 시대에는 당시 경제의 근간인 농민들의 경제 안정책을 마련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위해 비효율적이던 석제 농기구를 쓰는 것을 탈피하여 철제 농기구를 보급하고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했으며 황무지의 개간을 권장했다. 또한 저수지 등의 치수시설을 축조하여 안정적인 생산이 가능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안정책을 쓰더라도 그 당시 농업은 생산력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만 되면 먹을 것이 부족하기 일쑤였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굶어 죽는 농민들을 비롯한 백성들의 삶은 매우 괴롭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고구려의 고국천왕은 백성들의 이런 고충을 받아들여 진대법이라는 구휼정책을 쓰기도 했다.(고구려의 진대법 기사 바로가기)

그렇다면 수공업은 어땠을까? 삼국 초기에는 기술이 뛰어난 노비에게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게 했는데, 대표적 생산품으로는 무기나 장신구 등이 있었다. 체제를 정비하고서는 공업을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이 관청에 수공업자를 배정해 무기, 비단 등을 생산했다.

상업은 정부와 지배층의 필요와 농업 생산력이 미약해 수도와 같은 주요 도시에만 시장이 형성됐었다. 신라는 5세기 말 경주에 시장을 설치하고 6세기 초 지중왕때 시장 감독 기관인 동시전을 설치했다.

무역은 왕실과 귀족의 필요 물품에 의해 공무역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4세기 이후 국제 무역으로 발달되었다. 고구려는 남북조, 북방 유목 민족과 교류를 하며 외교 관계를 맺었고, 백제는 남중국, 왜와 활발한 무역을 전개했다. 신라는 한강 유역 확보 이전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중국과 무역을 했지만 한강 진출 이후에는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 직접적으로 무역을 진행했다.

고대 삼국시대는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수탈과 노비의 생성이 많아진 시기다. 허나 수탈의 한계를 느낀 각국은 비교적 합리적인 체계로 조세를 걷는 방법을 선택한다. 생산력이 약한 시기라 시장이 형성되기 어렵고 대부분의 경제활동은 왕과 귀족에게 바치는 때였다. 현재와 규모는 다르지만 뭔가 느낌이 비슷한 게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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