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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 기자] 고대 삼국시대는 부족국가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에 있어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 과연 삼국시대의 통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지방단체)나 신라의 6부가 중앙의 지배 집단이었는데, 각 부는 중앙 왕실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각 부의 귀족들은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여러 부의 힘을 통합하여 국가의 동원력을 강화하는 일은 각 부의 귀족들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결정하였다.

삼국의 대표적인 회의체로는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회의가 있었다. 이 들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고구려는 중앙 통치 체제로 5부와 제가 회의(대대로)가 있었다. 고구려 초기에는 왕이 나랏일에 대해서 임의로 결정을 할 수 없었다. 국가의 일을 진행하려면 왕과 왕실의 유력 세력 및 각 부의 장들인 5부의 수장들인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논의하고 결정을 했다. 그러다 6세기 이후, 귀족 회의체의 의장으로 대대로가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14관등을 두었는데, 형(兄) 계열과 사자(使者) 계열로 나누었으며 왕도 및 지방 5부의 군사적인 임무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욕살’을 두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5부와 정사암 회의(좌평)을 두었는데, 기존의 마한 연맹체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5부 체제가 성립되었다. 고구려의 제가 회의처럼 백제는 정사암 회의를 두었는데 이 때 좌평을 의장으로 하였고 추후 6좌평으로 분화되어 권력이 약해졌다. 또한 백제는 16관등을 두었으며 크게 솔계와 덕계의 계열로 나누어졌다.

삼국유사에는 정사암이라는 바위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는데, ‘호암사에는 정사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 3~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 보고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그 바위의 이름을 정사암(政事巖:정사를 돌보는 바위)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 백제의 최고 회의를 이 정사암에서 했다고 하여 정사암 회의라 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는 다르게 양부, 사량부, 본피부, 한기부, 습비부, 점량부의 6부 체제를 토대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을 의장으로 하는 화백 회의가 성립되었다. 신라는 17관등을 두었으며, 크게 찬(간)계 관등과 나마 계열 관등으로 나뉘어 졌었다.

삼국의 지방은 타 국가와 국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 행정 조직은 곧 군사 조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지방관의 수가 많지 않아 주요 거점만을 집중 지배하는데 그쳤고 나머지 지역은 자치를 허용하여 간접적으로 주민을 지배했다.

이에 삼국의 지방 제도를 간략하게 알아보면 고구려는 전국을 5부로 나누고 ‘욕살과 처려근지’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백제 역시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방령을 파견하였으며 5방 하에 37군을 설치해 ‘군장’을 파견했다. 신라는 전국을 5주로 나누어 ‘군주’를 파견하고 작은 읍락인 군에는 당주를 파견했다. 그리고 행정적, 문화적 성격이 강한 지방 통치 조직인 2소경을 두고 장관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이상으로 고대 삼국의 통치 체제를 알아보았다. 중앙 집권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각 부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합의체가 있었고, 지방은 자치를 하게 하는 등 통치력이 닿을 여력이 없었다. 때문에 의도치 않게 민주적인 방법(완전한 민주주의는 아니지만)으로 지도자를 뽑는 등의 체제를 구축했던 때도 있었지만, 국방력이 곧 국력이었던 시기여서 강력한 중앙 집권 주의가 필요했고, 결국 국가가 번성하고 규모가 커지자 차츰 왕에게로 권력이 이동했다.

이와 같이 통치 체제는 각 시기의 필요에 따라 그 모습도 달라진다. 부족국가였던 고대 국가들이 어떻게 한 명의 왕에게로 권력이 집중 되었는지를 잘 알아보는 것도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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