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승재 / 디자인 이연선 pro] B회사의 점심시간. 부장은 직원들에게 오늘 점심은 짜장면을 먹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모든 직원들이 나쁘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가 가서 짜장면을 먹고 회사로 돌아왔다. 몇몇이 함께 양치를 하러 화장실에 갔는데,그 때 차장이 “난 속이 더부룩해서 짜장면이 먹기 싫었어.”라고 말한다. 그러자 옆에서 듣던 대리는 “사실 나도 면보다는 밥이 먹고 싶었어요.”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도 짜장면이 먹기 싫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은 도대체 왜 점심에 짜장면을 먹은 것일까?

‘애빌린의 역설’ 위와 같은 사례를 설명할 수 있는 용어다. 애빌린의 역설이란, 한 집단 내에서 그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각자가 원하지 않는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함께 자신의 의사에 상반되는 결정을 내리는 데 동의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집단 내 구성원이 집단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집단의 의견에 반대하지 못한 채 동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용어는 경영전문가 제리.B 하비가 자신의 논문인 ‘애빌린의 역설’과 경영에 대한 다른 고찰에서 처음 사용됐다. 하비는 이 논문에서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제시한다.

“텍사스 주에 거주하던 한 가족. 아버지는 애빌린으로 외식을 나가자고 제안했고, 사위와 딸, 부인은 모두 동의해 길을 나섰다. 그렇게 가족들은 뜨거운 햇살 아래 에어컨도 없는 차를 타고 애빌린을 향했다. 왕복 3시간이나 걸려 애빌린에서 음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하나 둘 불평을 털어놓는다. 어느 누구도 애빌린에 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빌린’의 역설이라는 용어는 애빌린에 가자는 장인어른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 않았지만 반대하지 않았던 것에서 유래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회적 일치’와 ‘사회적 인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두 용어를 쉽게 설명하자면 결국 인간 존재는 집단의 경향에 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혹시나 제안을 반대해 제안자가 무안해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혹은 제안의 결론이 어떻든 갈등을 피하고 빠른 결론을 내고 싶어 하기 사람들의 인식 때문에 누군가의 의견에 반대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제안을 거절해서 발생하는 집단 혹은 조직 내의 불이익이 걱정돼 제대로 반대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기도 한다. 즉, 애빌린의 역설은 제안에 대한 반대로 발생하는 인지적, 시간적, 경제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반대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줄인다고 해서 최선의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싫어하는 메뉴를 먹는 것에서 그치겠지만 사회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보다 큰 피해를 야기한다. 실제로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의 피그스만 침공은 애빌린의 역설로 인해서 실패한 사례 중 하나다. 침공에 대한 위험을 현실적으로 평가하지 못한 채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이에 반대하는 이가 없이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결국 미군은 침공에서 패배했고, 쿠바의 카스트로는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애빌린의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 반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선뜻 자신의 반대의견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용기 있게 반대 의견을 꺼낸다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의견을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사회의 발전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하나의 주장인 정(正)에 모순되는 다른 주장인 반(反)이 만나 겨루면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에 이른다는 것이다.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나라의 정책 결정까지 우리는 수많은 제안과 선택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제안으로 인한 결과는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어떠한 제안이 조금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용기 있는 ‘첫 번째 반대’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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