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7 미국이 이겼지만 개항에 실패한 ‘신미양요’ [키워드 한국사]
EP.117 미국이 이겼지만 개항에 실패한 ‘신미양요’ [키워드 한국사]
  • 보도본부 | 이호 기자
  • 승인 2017.02.1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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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 초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으로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학살한 병인사옥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에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팽배해져 조선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1866년 8월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에 이르러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 올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을 요구하다 군민과 충돌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가 쏜 대포로 인해 조선 군민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몰살시키니 이 사건이 바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다.

1871년, 미국은 조선에게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손해배상을 받고 개항을 요구하기 위한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미국은 주청미국공사 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였고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조선 원정을 할 것을 명하여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해 5월 16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이는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으로라도 조약을 맺게 하려는 의도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며 조선에게 일방적인 통고를 하고 탐측항행을 강행했다.

이에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연안의 강화보대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아 최초의 군사적 충돌사건이 발생했다. (손돌목 포격사건)

이에 미국은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자신들에게 포격을 가했다며 비난을 하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하고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이 요구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조선은 강화해협이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평화적인 탐측활동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주권을 침해하고 영토를 침략한 행위라며 맞불을 놓았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미군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게 되었다. 미군은 강화도의 초지진을 함포로 무력화 시켰고 덕진진과 광성보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미국의 침략 성격은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개항’을 시키는데 의의가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거나 영토 분할을 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이상의 공격을 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으며 미국은 조선에 개항을 할 것을 요구했지만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이양정책에 의해 조선의 개항을 단념하고 함대를 철수했다.

이로써 조선은 개항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 일본은 일찍이 네덜란드에 개항하여 미국과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지만 조선은 결국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근대화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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