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해 왕과 신하의 조화를 표방한 나라였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접어들면서 안동 김씨가 득세한 세도정치로 인해 왕권은 한없이 약해져 가고 있었고 친인척들을 위시한 막강한 가문들이 권력을 좌지우지 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먼저 왕권강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했다. 경복궁을 재건하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대원군은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거뒀고 그마저 줄자 상평통보의 100의 가치를 가진 당백전이라는 고액 화폐를 발행했다. 당백전은 실질적으로 상평통보의 6배 정도의 가치를 가졌지만 100배라는 명목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조정은 단기적으로 큰 이익을 보는 장사였다.

하지만 눈가림일 뿐이었던 당백전의 발행은 곧 조선의 경제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어 백성들에게 필요 없는 고통을 더욱 안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서구의 새로운 문물과 사상 특히 천주교 등의 종교가 왕권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해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고 쇄국정치를 펼쳐 국제 관계를 악화시켰다. 흥선대원군의 이 같은 정책은 우리가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크게 늦추는 요인이 되고 일찌감치 서양국가의 문물들을 흡수하여 강대해진 일본의 침략 야욕에 대응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하던 시기 프랑스 함선(병인양요/1866)과 미국의 함선(신미양요/1871)을 물리쳤는데 이는 집권 초기에 행했던 개혁정치를 통해 강력한 국방력을 자랑하는 모양이 되기는 했지만 더욱 서구에 문을 잠그는 계기가 되어 수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주요 장소에 척화비를 세워 자신의 쇄국정치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줬다.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어린 고종을 대신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10년간이나 휘둘렀다. 하지만 고종 역시 10년의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었으므로 권력을 아버지에게서 돌려받길 원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고종 내외는 권력을 되찾아오기 위해 최익현과 반 흥선대원군 세력을 부추겨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유도했다. 이를 빌미로 고종은 1873년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여 흥선대원군은 강제로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강제로 권력에서 쫓겨난 흥선대원군은 정계에 복귀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이런 그의 의지는 이를 막으려는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무던한 노력이 무색하게 고종이 권력을 찾자 정국은 명성황후의 집안인 민씨가가 주도하여 또다시 외척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립하여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역모에 연루되기도 하였고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난병들의 사태수습을 빌미로 입궐해 도망간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여 잠시 정권을 되찾기도 했다.

하지만 청나라를 뒤에 업은 명성황후에 의해 대원군은 청나라에 3년 동안 납치되기도 했으며 위안스카이와 결탁을 하기도 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동학 세력과 통하기도 했다. 또한 갑오경장 때는 일본이 그를 이용하기 위해 군국기무를 총괄하도록 위임받게 했지만 일본의 의도와 달리 자신의 정치소신을 피력하자 일본은 그를 바로 은퇴시켜 버렸다.

이런 대원군의 행동은 고종을 심히 불안하게 만들어 1895년 고종은 대원군의 정치활동을 대부분 제한하는 조치(대원군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를 취해 사실상 유폐시켜 버렸다.

친러 성향의 명성황후의 권력이 강력해지자 위기를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일본은 은거하던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에 입성,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이로 인해 대원군은 자신의 정적인 명성황후 시해에 빌미를 제공하였다는 평을 받게 된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고 조정은 친러정부가 되어 버린다. 이에 대원군은 다시 은거하였고 더 이상 정계에 진출 할 수 없었다.

왕위와 멀었지만 시국을 읽는 능력이 탁월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든 흥선대원군. 조선 말기의 권력을 장악하고 실각하는 것을 반복한 그는 그야말로 마지막 권력의 화신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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