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문선아]

▶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 Audrey Kathleen Ruston)

▶ 출생-사망 / 1929년 5월 4일 ~ 1993년 1월 20일

▶ 국적 / 벨기에 브뤼셀

▶ 활동분야 / 배우

▶ 대표작 / ‘로마의 휴일(1953)’,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마이 페어 레이디(1964)’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배우에서 유니세프의 어린이를 위한 국제적인 외교 사절단이 된 배우

 

-가난한 발레리나에서 할리우드의 스타가 되기까지

벨기에 브뤼셀 출신인 오드리 헵번은 영국계 아버지와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남작 가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헵번은 6살 이후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와 영국을 오가며 살았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좋아했던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길 원했지만 전쟁 후의 가난은 그녀의 꿈을 앗아갔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발레로 다져진 우아한 몸매와 귀엽고 발랄한 외모는 영국에서 단역 배우로서의 삶으로 이끌었다. 소설가 콜레뜨가 그녀의 떡잎을 알아보고 자신의 작품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헵번을 전격 캐스팅했다. 그렇게 연기를 시작한 헵번은 1953년 윌리엄 와일러가 만든 영화 ‘로마의 휴일’에 공주역으로 캐스팅, 단숨에 세계적인 일약 스타가 됐다.

-베이비붐 세대 여성들의 아이콘 ‘오드리 헵번’

영화 ‘로마의 휴일’의 성공은 그녀를 세계무대로 이끌었고 겨우 스물네 살의 헵번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줬다. ‘오드리 헵번스타일’ 이라는 자신만의 패션세계도 구축한 그녀는 베이비붐 세대 여성들의 아이콘이 됐고 그녀를 현대적인 젊은 여성의 역할 모델로 삼았다.

헵번이 영화에서 연기한 역할들은 교육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그녀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인 ‘아이의 시간(1961’),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그리고 ‘마이 페어 레이디(1964)’를 보면 그녀가 연기한 인물들의 매력이 언제나 교육과 노력과 적절한 예의범절과 관련되어 있다. 이 당시 교사들은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오드리 헵번을 꼽았다.

-자신의 명성이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된 오드리 햅번

그녀의 어린 시절은 외가의 재력과 어머니의 능력으로 어렵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유럽 전역에 독일의 나치즘이 퍼지자 그녀의 가세는 급속히 기울게 되었다. 세계 2차 대전 중에는 가난이 극도에 달해 굶어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녀를 구해준 것이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 기금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연기 활동을 줄이고 조용히 은둔하며 흠 없이 살아가고 있던 그녀에게 1988년 특별 초대된 마카오의 음악 콘서트는 그녀에게 특별한 경험이 됐다. 자신의 명성이 자선기금 모집에 도움이 되는 것을 경험한 그녀는 자발적으로 유니세프에 참여 의사를 전달했다.

오드리 헵번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오지, 전쟁터, 전염병 지역을 가리지 않고 친선대사 활동에 참여했다. 구호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배우 시절 잘 하지 않았던 인터뷰를 자청했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구호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직장암에 걸린 오드리 헵번, 마지막까지도 나눔을 전파하다

60세가 넘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고 현장에서 받는 정신적 충격 등으로 헵번의 건강은 계속해서 악화됐다. 1992년 소말리아 방문 때에도 진통제로 아랫배 통증을 참아가며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돌아온 이후 병원에 방문한 그녀는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3개월의 시한부를 진단 받은 오드리 헵번은 죽기 직전 맞은 크리스마스에서 자식들에게 마지막까지도 나눔의 중요성을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통해 유언처럼 읽어줬다.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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