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시행되었던 제 1차,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은 외화 확보였다. 1962년 이승만 정권말기에 이미 무상원조 방식으로 도입되던 외국 자본이 점차 차관으로 전환하기 시작되었다. 이는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되면서 시작되었는데 미국의 재정차관을 중심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다 1965년 한일 협정 이후 상업차관과 일본인 직접투자가 급격하게 확대되면서 과거 식민 모국이었던 일본의 자본이 20년 만에 다시 침투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독, 영국, 프랑스 등 선진자본에게도 개방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경기가 불황에 빠지면서 차관기업도 경영부실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고 차관원리금까지도 보증은행으로 하여금 대불하게 하는 사정으로 발전하였다. 정부는 이 부실기업에 대하여 정부 내에 특별대책기국까지 만들어 기업의 통폐합 등 강력한 수단으로 대처하는 한편 외자도입의 형태를 직접적인 원리금 상환부담이 없는 외국인 직접투자로 전환하는 것을 꾀하였다. 

또한 베트남 파병은 우리나라에 엄청난 외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브라운을 통해 미국은 한국군 전투병력의 월남 파병에 대한 대가로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강화하는 동시에 파월병력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한국 예산에 배당하도록 하였다. 

파병과 함께 베트남에 대한 상품과 용역의 수출이 1962년에는 83만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1965년 1,500만 달러에 이르는 등 그야말로 ‘베트남 특수경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월남파병과 관련하여 가장 큰 수입은 상품의 수출보다는 용역 및 주월한국군의 송금에 의한 무역외 외환수입이 더 크고 중요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건설과 용역 송금에 의한 외화 수입은 연평균 1억 달러를 초과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공업에 있어서도 자립을 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소비재공업의 자립화는 경제개발 초기단계부터 목표로 삼았는데 외국에서 수입해오던 것들을 국내에서 생산하고 그 투자재원을 국내에서 조달하기 위함이었다. 

1960년대 수입대체공업 정책을 통해 정유 비료, PVC 제품, 화학섬유 등의 호학공업, 유리 및 시멘트 공업, 전기 및 전자기기 및 수송용 기계제품 등이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광공업은 전체 성장을 견인할 만큼 중요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부터는 정부가 개방화 정책으로 전환하여 수출에 각종 지원과 특혜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농수산물, 광물 및 섬유, 신발 등의 경공업제품 등의 수출이 증대되었다. 그리하여 1964년에 가동되기 시작한 울산 정유공장, 1969년에 조성된 마산의 수출자유지역과 1970년 7월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당시 경제 개발의 꽃이라 부를 만 하였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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