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지역을 넘어 전 세계 각계각층에서 존경받는 사람들. 그런 역량을 갖춘 인재이자 국가나 기업을 ‘글로벌 리더’라고 부른다. 역사 속 그리고 현재의 시대를 이끌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그들의 삶의 기록과 가치관 등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시선뉴스=정혜인 기자ㅣ살다 보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이들이 있다. 영국의 가수·작곡가, 피아니스트, 사회 운동가, 프로듀서, 기획자, 라디오 진행자, 왓포드 FC 전(前) 회장이자 종신 명예 회장인 엘튼 존이 바로 그렇다. 그는 2017년 영화 ‘킹스맨: 골든 서클’에도 본인 역으로 출연하며 젊은 세대에게도 얼굴을 알렸다.

4살부터 배운 ‘피아노’

엘튼 존 [사진/위키피디아]
엘튼 존 [사진/위키피디아]

1947년에 태어난 그는 ‘엘튼 존’이 아닌 레지낼드 케네스 드와이트란 이름으로 자랐다. 엘튼 존은 3~4살 무렵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재능은 트럼펫 연주를 줄곧 했던 아버지와 열정적인 음반 수집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엘튼 존은 지금까지도 화려한 연주 스타일로 유명하다. 그는 클래식 음악과 가스펠, 블루스, 로큰롤의 영향을 받아 풍부한 화음을 넣으며 건반을 거세게 내리치는 편이다.

‘엘튼 존’의 시작

엘튼 존 [사진/위키피디아]
엘튼 존 [사진/위키피디아]

1962년, 엘튼 존은 리듬앤 블루스 밴드 블루솔로지(Bluesology)를 결성해 학교도 중퇴하고 음악 작업을 이어갔다. 블루솔로지는 음악가 롱 존 볼드리를 돕는 보조 밴드 일도 했는데, 이때 블루솔로지의 리더는 색소폰 연주자 엘튼 딘이었다. 블루솔로지에서 활동하던 엘튼 존은 그룹 탈퇴 후 독립에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원래 이름보다 발음하기 쉬운 예명을 고민한 끝에 ‘엘튼 존’(엘튼 딘+롱 존 볼드리)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활동

엘튼 존 [사진/위키피디아]
엘튼 존 [사진/위키피디아]

지금의 그는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뮤지션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음악 활동 초기부터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았다. 1969년 발매한 첫 정규 음반 ‘Empty Sky’는 점점 많은 관심을 받다가 각국의 음악 차트에 이름을 올렸고, 그 이후 발매한 2집 ‘Elton John’은 네덜란드 음반 차트 2위, 빌보드 200 4위, 영국 음반 차트 5위 등을 기록했다. 엘튼 존의 2집은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음반 부문과 최우수 남성 팝 보컬 부문 후보에 오르며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그 뒤에도 계속 골드 레코드를 발표하며 싱어송라이터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펼친 선한 영향력

엘튼 존과 버락 오바마 [사진/위키피디아]
엘튼 존과 버락 오바마 [사진/위키피디아]

엘튼 존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음반을 판매한 뮤지션이자,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영국 솔로 뮤지션이다. 빌보드도 시대별 아이콘에서 1970년대 아이콘으로 엘튼 존을 선정했다. 그는 이뿐만 아니라 각종 자선 활동으로 선한 영향력을 보여 왔다. 함께 활동했던 라이언 화이트, 프레디 머큐리 등의 인물들이 HIV로 세상을 떠나는 걸 봐왔기 때문일까. 1980년대 후반부터 HIV 퇴치 운동에 참여하다가 1992년에는 비영리 단체 ‘엘튼 존 에이즈 재단(Elton John AIDS Foundation)’을 설립했다.

한편 그는 엄청난 수집광으로도 알려졌다. 수십 년간 많은 작품을 수집해 오다가 최근 21년 만에 자신의 소장품들을 경매에 내놨다. 그의 소장품 중에는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작품도 포함되어 더욱 주목받았다. 살아 있는 전설이자 음악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엘튼 존’. 그와 함께 한 세대를 보낼 수 있음에 감사를 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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