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시선뉴스 이호기자] 668년 고구려는 신라, 당의 연합군에 멸망하였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은 당나라로 끌려가는 모욕을 당했으며, 수도인 평양성에는 당의 관청인 안동 도호부가 들어섰다.

당에 극심한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당의 식민 정책에 극렬한 반발을 했다. 이에 670년,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안시성에서는 안승과 검모잠이 군사를 일으켜 당과 대립하였다.

비록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긴 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신라가 당과 영토 분할 문제로 전쟁을 벌이자 신라의 편에서 같이 싸웠다.

이에 당은 고구려인들에 대한 강경책은 힘의 소모가 크다고 판단하여 회유책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 잡아갔던 보장왕을 다시 고구려로 데려와 ‘요동주도독 조선왕’에 앉힌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고구려인은 영원한 고구려인, 보장왕은 당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그 지역의 말갈족까지 포섭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 부흥을 모색했다.

하지만 보장왕의 부흥 운동은 당이 눈치를 채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당의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어 사망한다.

당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국외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요하 서쪽의 영주 지방으로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유입됐다. 이에 원래 거주하고 있던 거란족과 고구려 유민, 말갈족이 영주 지역에서 섞여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던 중 영주도독 조문홰의 가혹한 통치에 거란인 이진충, 손만영 등이 696년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영주도독 조문홰를 살해하고 영주를 점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영주 일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 고구려 장수출신 유민인 걸걸중상과 말갈인 걸사비우는 억압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걸걸중상은 바로 대조영의 아버지다.

당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에게 벼슬을 내려 회유하려 했지만 실패하여 거란 출신 장수 이해고를 출전시켜 토벌하게 했다. 이해고는 말갈족을 먼저 공격하여 걸사비우는 사망하게 됐고 이 무렵 걸걸중상도 사망했다.

이에 대조영은 패전한 말갈족을 고구려 유민에 흡수, 동쪽으로 진군하여 천문령에 도착했다. 천문령은 산세가 매우 험하고 매복 습격이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어 적은 수로 대군을 치기에 매우 적합한 위치였다.

당의 군사들은 말갈군을 격파하고 기세가 오를 대로 올라 대조영의 유인 부대를 따라 천문령 골짜기에 따라 들어갔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구려 군사와 말갈 군사들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는데, 기록에는 이 전투로 당의 군사들이 거의 전멸하여 이해고 혼자 당으로 돌아왔다고 남겨져 있다. 이렇게 탁월한 전술로 천문령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대조영은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되었다.

대조영이 동모산에 성을 쌓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소문이 퍼지자 흩어져 있던 유민들이 모여들었다. 대조영은 이렇게 흩어진 고구려의 유민을 수습하고 말갈족을 통합하여 결국 698년 발해를 건국하게 됐다.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던 대조영은 빠른 시간 안에 나라의 기틀을 잡고자 동부 만주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왕이 된 첫 해에는 돌궐과 국교를 맺고 신라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연호를 사용하여 독립국가임을 대내외로 알렸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해야 했던 것을 상기하여 역시 고구려의 유민들이 모여 만들어진 발해를 인정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이에 당은 사신을 보내 발해 건국에 대해 축하를 해 주었고 대조영 또한 둘째 아들인 대문예를 보내 답례를 하는 등 당과의 화평을 도모했다. 하지만 옛 고구려의 후예격인 나라가 다시 출현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와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 후 치렀던 영토전쟁으로 서로에게 돌렸던 등을 다시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719년 대조영은 세상을 떠났고 시호는 고왕(高王)으로 책봉됐다. 대조영의 발해가 건국됨으로 인해 한반도에는 남북국 시대가 열렸다. 발해의 중앙에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으며 대조영은 고구려의 후예임을 건국 당시 선포했다.

또한 발해 영토에 신라도(新羅道)라는 교통로를 두어 신라와의 교역도 중히 여겼는데, 이는 신라와 발해가 한 민족이었음을 인정하는 증거가 된다. 또한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내용이 있는 등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지속적으로 알렸다.

또한 발해의 미술이나 무덤 양식 등이 고구려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발해의 돌 사자상, 돌방무덤 등의 유적과 온돌을 사용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증거다.

이런 증거들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며 발해와 고구려를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반하는 사료로 발해가 지배했던 광활한 만주 지역의 영토가 우리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만주의 진정한 주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발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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