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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한반도는 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국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에는 중고의 왕권을 상징하던 신라 삼보(진흥왕대에 만들어진 황룡사장륙존상(皇龍寺丈六尊像),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허리띠[天賜玉帶], 그리고 선덕여왕대에 만들어진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의 3가지 보물)를 대신하는 만파식적 이라는 영험한 피리가 있었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만파식적에 대한 설화이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성은 김씨다. 681년 7월 7일 왕위에 오르자 문무대왕(文武大王,법민)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감은사에 대한 내용으로는 문무왕이 왜군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짓기 시작했지만 완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은 통일 후 불안정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기 때문에 지의법사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불식에 따라 고문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감은사는 결국 그 아들인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해인 개요 2년에 공사를 마쳤는데,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였는데, 왕의 유언에 따라 뼈를 보관한 곳이므로, 대왕암(大王岩)이라 하였고, 절은 감은사(感恩寺), 또한 뒤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불렀다.

다음해 임오년(서기 682) 5월 초하루에는 파진찬 박숙청(朴夙淸)은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있었는데,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와서 물결에 따라 오가고 있다”고 아룄다. 왕이 이상하게 여기어 천문을 담당한 관리인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거룩하신 선왕께서 이제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기에 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의 한 분으로 이제 이 신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성을 지킬 보물을 내리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 얘기를 들은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행차해 산을 바라보고는 사람을 보내 살펴보도록 했다. 산의 모습은 마치 거북이 머리 같았고 그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해졌다. (일설에는 산도 또한 대나무처럼 낮에는 갈라지고 밤에는 합해진다고 하였다.)

이때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갔는데, 용이 검은 옥띠를 받들고 와서 바쳤고, 왕이 용을 맞이하여 함께 앉아서 물었다. “이 산의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해지는 것은 어찌해서인가?” 그러자 용이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합해진 연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거룩하신 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서 불면 천하가 평화로워 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마음을 합치셔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바치도록 하셨습니다.”라고 말 한 것이다.이를 왕에게 아뢰자 왕은 감은사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오시, 대나무가 합해져서 하나가 되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깜깜하였다가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이다.

“이 옥띠의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 다 진짜 용입니다.”왕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서 오색찬란한 비단과 금과 옥으로 용에게 보답하였다. 그리고 명을 내려 대나무를 베도록 하였는데, 바다에서 나올 때 산과 용이 홀연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는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일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축하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옥대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태자가 아뢰었다.

“하나를 따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왼쪽 두 번째 것을 따서 계곡물에 넣었더니 곧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다. 그래서 이 연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문왕은 궁으로 돌아와서 용이 일러 준 대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다.

과연 그 피리는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고,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파식적(萬波息笛: 많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은 것이다.

이상이 통일 신라의 새로운 국보, 만파식적의 설화다. 만파식적의 의의는 죽은 문무왕이 용으로 다시 출현해 그 다음 왕인 신문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만파식적을 주는 것으로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왕실의 번영과 평화를 상징한다. 또한 나눠졌다가 합쳐지는 대나무는 신라가 통합시켰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의 민심이 통합되는 것을 꾀하는 호국사상의 염원 역시 담겨져 있다.

하지만 단군 신화나 고대 국가의 탄생신화와는 달리 왕권에 관해서만 정당성을 부여하는 설화이기 때문에 전능한 신화의 기능은 약화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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