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팝 음악 역사를 나누는 그들 ‘비틀즈’
[카드뉴스] 팝 음악 역사를 나누는 그들 ‘비틀즈’
  • 보도본부 | 박진아 기자
  • 승인 2019.03.0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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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박진아 / 디자인 김미양] 113주,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기간. 16억장, 전 세계에서 그들의 앨범이 팔린 장수. 21곡,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한 곡 수. 3,000명 이상, 이 밴드의 한 곡을 리메이크한 가수들.

미국 내 최다 다이아몬드 인증 앨범을 보유한 그룹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매하고, 빌보드에서 최장기간 1위를 한 전설적인 그룹. 바로 ‘비틀즈’입니다.

“팝 음악의 역사는 이들의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 BBC의 라디오 프로듀서 빅 갤로웨이의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들. 바로 비틀즈입니다. 존 레논과 폴 메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이 네 명의 청년들로 구성된 비틀즈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음악은 물론 문학, 미술 등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1957년, 항구 도시 리버풀. 이곳엔 17살 존 레논이 이끌던 밴드, ‘쿼리맨’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밴드는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그곳을 지나던 15살 폴 메카트니를 사로잡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년 뒤 폴 메카트니의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이 밴드에 합류 했고, 베이시스트로 스튜어트 서트 클리프가, 드러머로는 피트 베스트가 영입이 되면서 밴드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존과 폴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쿼리맨이라는 명칭을 쓸 수 없게 됐고, 여러 이름으로 활동을 하다가1960년 8월 ‘더 비틀즈’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인 다섯 명은 라이브 경험을 쌓기 위해서 함부르크와 리버풀 등에서 100회가 넘는 공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1961년. 훗날 자신들의 매니저가 될 ‘브라이언 앱스타인’을 만나게 됩니다.

항상 뭔가 조금 부족한 상태였던 비틀즈. 그런데 브라이언 앱스타인을 만나면서부터 변하게 됩니다. 헤어스타일이 변하고, 정장을 입게 되고.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의 비틀즈가 바로 이때 완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비틀즈에게는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겼는데요. 당시 베이스를 맡았던 스튜어트와 드러머였던 피트베스토가 떠나고, 링고 스타가 드럼을 맡으면서 4인 체제의 밴드로 변합니다. 이렇게 4인 체제의 밴드로 꾸려진 그들은, 1963년 영국에서 첫 데뷔 앨범을 발매하게 되는데, 이 때 수록곡이었던 Please Please Me와 Love Me Do가 영국 차트 1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발매되는 앨범들도 차트를 석권하고 100만 장 이상 팔리는 쾌거를 이루게 되죠. 이렇게 유럽을 달군 비틀즈의 인기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건너가게 되고, 1964년에는 비틀즈의 노래5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서 5위까지, 모두 차지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던 그들. 자유로운 음악형식과 편곡을 시도해 발라드풍의 ‘Yesterday’를 선보였고, 동요풍의 ‘옐로 서브머린’,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엘러너 릭비’ 등의 만들며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 나갔습니다. 그렇게 60년대 초중반 비틀즈는 승승장구 하며, 영국의 국위를 선양했다며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비틀즈에게도 위기는 찾아왔습니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매니저 브라이언 앱스타인이 사망하면서 멤버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고, 팀에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그렇게 비틀즈 멤버들은 ‘Abbey Road’를 마지막으로, 1970년 해체를 합니다.

로큰롤을 비롯해 컨트리, R&B, 포크, 심지어 블루스와 재즈까지. 비틀즈는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음악적 실험을 통해 다양한 음악을 대중들에게 선보였고, 그 속에 사회적 메시지까지 담아냈습니다.

비록 갈등으로 해체하긴 했지만, 그들이 해체한지 50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그들이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원한 건 오로지 하나 ‘음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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