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이정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그 어떤 대회보다 귀화 한국인들이 많이 출전하였고, 그로 인해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반만년을 단일민족으로 지내온 우리에게 귀화라는 단어는 여전히 조금 낯설다. 그러나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폐쇄적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서양인 귀화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연이다. 

1627년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와 두명의 동료는 태풍을 만나 식수를 구하기 위해 제주도에 상륙하게 된다. 그러나 곧 제주도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곧바로 한양으로 압송된다.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관례로는 접견 국가 출신의 표류자는 직접 송환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중국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명과 후금이 다투고 있었고 왜관을 통해 왜로 보내려 하였지만 일본은 이들이 크리스천이며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게 된다. 

조선 역시 정묘호란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대포와 총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조선에 체류하도록 하였고 이들은 귀화하여 훈련도감(조선시대에 수도의 수비를 맡아보던 군영)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벨테브레이는 동료들과 함께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박연은 동료 2명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게 된다.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 벨테브레이는 조선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그는 벨테브레이와 얀의 발음과 비슷한 박연으로 조선 이름을 얻었고 조선의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게 된다. 

또한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여 항복해 온 일본인과 청나라 포로를 감시하는 일과 청나라를 피해 조선으로 귀화해 온 명나라 사람들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 그리고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 및 조작법을 조선군에게 지도하는 일을 하였다. 

1653년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박연은 제주도로 내려가 그들이 통역을 맡았다. 그런데 박연은 조선에 온 지 26년이나 지났고 동료들이 병자호란으로 죽어 네덜란드어를 쓸 일이 없어 처음에는 통역을 꽤 힘들어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연은 하멜 일행을 만난 후 숙소에 돌아와 소매가 젖을 정도로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폭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연은 결국 조선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하멜은 결국 1668년 탈출하였지만 그는 조선에 그대로 남은 것이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박연은 처음에 탈출을 생각했지만 그의 화포에 대한 기술력을 높게 여긴 효종이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조선에서 벼슬까지 하는 등 좋은 대접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갈 의지가 없다며 철저한 조선인으로서 하멜을 대했다.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의 귀화인이 되었던 박연. 서양인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가득했던 조선시대였지만 박연은 조선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고 박연 역시 조선인으로서 살다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인들이 하멜에게 물었다. “이 자(박연)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멜은 “우리 네덜란드 사람이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선인들은 웃으면서 말했다. “틀렸다. 이 자는 조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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