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기자/디자인 이연선]

▶ 자와할랄 네루 (Pandit Jawaharlal Nehru)
▶ 출생-사망 / 1889.11.14 ~ 1964.5.27.
▶ 국적 / 인도
▶ 활동분야 / 정치
▶ 주요저서 / <인도의 발견>, <세계역사 이야기>, <세계사 편력1>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의 정치가로 간디의 영향을 받아 반영(反英)독립투쟁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결합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비동맹주의를 고수하며 총 9차례 체포되어 약 10년 간 감옥 생활을 하였고, 인도의 초대 총리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부유한 귀족 출신이 그가 이처럼 험난한 정치가의 길을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 간디를 만나 정치에 눈을 뜨다

북인도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네루는 16세 때 영국으로 유학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뒤 1912년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당시까지 네루는 별다를 것 없는 서구 친화적 부유층 자제였으나 1915년 모한다스 간디가 앞장 선 비폭력 투쟁을 접한 후 매료되어 그의 행동주의를 받아 국민회의파에 참가하면서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농민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이내 정치에 대한 시각이 열리게 되었다.

- 분노로 인해 점화된 정치적 잠재력

1919년 네루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평화 시위 중인 인도인에게 영국군이 무차별 발포(암리차르 학살) 한 것이다. 네루는 이 사건의 진상 조사단으로 활동하며 정치가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립을 위해 비폭력 투쟁을 이어가던 중 네루는 9회 투옥되어10여 년 간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투옥 당시 딸 인디라를 생각하며 저서한 책 <세계사 편력>은 현재까지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 굽히지 않는 독립 의지 ‘비폭력’으로 세우다

네루는 1929년 국민회의파 라호르대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오랜 염원이었던 인도의 완전 독립을 국민회의의 목표로 정식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간디의 비폭력 투쟁에 감명 받았던 터라 목표를 이루기 위한 비폭력 투쟁 방법을 채택했다. 이듬해 네루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1930년 1월 26일을 ‘독립의 날’로 선포하여 현재까지도 ‘공화국의 날’로 지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이후 간디와 함께 체포를 감안하며 불복종 운동을 펼쳐나갔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에 협조 역시 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전 종료 후인 1947년, 인도가 파키스탄과 분리 독립되면서 네루는 총리 겸 외무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 정치/종교적 반대 세력...가족의 비극

네루는 간디의 영향력을 받아 영국으로부터 독립이라는 정치적 업적을 이루어 냈지만,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종교로 인한 비판 세력도 있었는데, 특히 네루가 독립 과정에서 이슬람 측을 포용하지 못하고 파키스탄의 분리를 방관했다는 부정적 시각이 늘어갔다. 뿐만 아니라 비폭력을 내세웠던 행보와 달리 1948년 파키스탄과 전쟁을 통해 카슈미르를 합병했고, 1961년에는 포르투칼 영토 고아, 다만, 디우를 무력 귀속시켰다.

그렇게 네루에 대한 앙금을 갖는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그는 무려 17년간 인도 총리직을 유지하다 1964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하지만 이후 총리직을 이어받은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와 외손주 라지브 간디는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유한 귀족 출신이었지만 거기서 안주하지 않았던 자와할랄 네루. 자진해서 암흑기의 인도 정치에 뛰어들어 인도의 독립까지 성취한 그의 업적은 간디와 더불어 인도의 위인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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