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기자/디자인 이연선 pro]

▶ 조지프 퓰리처 (Joseph Pulitzer)
▶ 출생-사망 / 1847.4.10 ~ 1911.10.29
▶ 국적 / 미국 (출생 : 헝가리)
▶ 활동분야 / 언론

‘퓰리처상’을 만든 미국의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 그는 상업성과 정론언론의 사이를 넘나드는 신문사 경영으로 현대 저널리즘의 전형을 만들었다. 사후에는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1917년 ‘퓰리처상’이 제정되었다.

- 비극의 연속, 가진 것은 언어 능력과 교양 뿐

유년시절 교육열이 뜨거웠던 아버지 덕에 헝가리어, 독일어,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은 퓰리처.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급격하게 기운 가정 형편에 군대에 지원하기 위해 남북 전쟁 중인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미국 하층민의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뉴욕에서 세인트루이스로 흘러들어간 퓰리처는 일자리를 구해 준다던 사람에게 수수료 명목으로 그나마 있던 푼돈마저 사기를 맞게 된다.  

- 사기 피해를 막기 위한 투고 글은 언론인의 출발점

퓰리처는 사기꾼에 의한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세인트루이스의 독어 신문 <웨스틀리체 포스트>에 억울한 사연을 독자 투고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올린 글은 신문사 간부들의 눈에 들게 되었다. 이유는 바로 어린 시절 쌓은 뛰어난 독일어 실력과 교양 덕 뿐에 문장력이 뛰어났던 것. <웨스틀리체 포스트>는 영어 실력은 없지만 다른 외국어와 교양이 출중한 퓰리처를 기자로 본격 채용했고, 그렇게 바닥까지 내몰렸던 퓰리처는 언론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 지독한 유태인

기자가 되어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진 퓰리처.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부족했던 영어 실력을 만회하기 위해 매진했고 금세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어려웠을 시절에도 사회에 대한 관심과 책을 놓지 않았기에 수많은 특종을 터뜨릴 수 있었고 기자로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된 후 하루에 16시간씩 일을 하는 등 몰두 했고, 동료들은 퓰리처를 “지독한 유태인”이라 부르기까지 했다. 결국 퓰리처는 <웨스틀리체 포스트>의 주식을 사는 등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기자가 된지 10년 만에 <세이트루이스 디스패치>와 <세인트루이스 포스트>사를 사들여 둘을 병합한 <포스트 디스패치>를 창간하게 되었다.

- 고정관념을 깬 신문,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

승승장구 하던 퓰리처는 쫓겨 나와야 했던 뉴욕으로까지 진출해 경영난에 허덕이던 신문사 <뉴욕월드>를 사들이게 된다. 그렇게 경영난의 원인을 탈피하기 위해 180도 변화를 감행했다. 바로 고정관념을 깨는 신문을 만들기로 다짐한 것. 그러게 퓰리처는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사건 사고를 다루는 것이 신문이라는 인식을 깨고 선정적인 내용, 스캔들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또한 퓰리처가 주목 받은 이유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스포츠 뉴스와 여성에 취향에 포커스를 맞춘 기사, 만화 삽화까지 신문에 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뉴욕으로 진출한 퓰리처가 신문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 현대 신문/언론 저널리즘의 물고를 튼 것이다. 그렇게 퓰리처가 손을 댄 <뉴욕월드>는 날개 돋친 듯 대중에 팔려나가게 되었다.  

- 권력으로부터 독립 되어야 한다는 언론사의 사명

퓰리처의 신문이 대중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비단 흥미로운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굳은 심지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자들의 비리 폭로에도 망설이지 않았다. 일례로 애초에 퓰리쳐와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이는 좋았다. 하지만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조용히 덮으려 했던 파나마 운하 사건에 대한 비리와 부정을 퓰리처가 대서특필하면서 둘은 법정 다툼까지 벌이게 된다. 하지만 퓰리처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승소하고야 말았다. 이는 ‘알권리’에 대한 언론사의 존재 이유를 확립하는 계기로 남게 된다.

- 퓰리처는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언론의 의미와 퓰리처 상

젊은 시절 온 열정을 언론에 쏟았던 퓰리처는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된다. 눈은 반 실명 상태가 되었으며 만성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은퇴의 길을 걷지만 그의 언론에 대한 사명감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에 올바른 언론인 양성을 위해 콜롬비아 대학에 기금을 맡겨 한 해 동안 가장 훌륭한 기사를 쓴 언론인에게 주는 상을 제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퓰리처상의 모태가 되었다.

그렇게 평생 언론인의 삶을 살던 퓰리처는 1911년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까지도 전 세계 언론의 뿌리로 기억되고, 1917년부터 매년 수여되는 퓰리처상은 언론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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