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정광윤 칼럼니스트] 최근에 필자는 두 권의 책을 우연히 접했다. 두 권 모두 금년 초에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책들이다. 『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와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라는 책이다. 전자는 요르겐 랜더스(Jorgen Randers) 노르웨이 대학교 경영대학원 기후전략 교수가 2012년에 쓴 책이고, 후자는 리처드 하인버그(Richard Heinberg) 탈탄소연구소 수석연구원이 2011년에 쓴 책이다. 요르겐 랜더스 교수는 로마클럽의 핵심 멤버였으며 그 유명한 『성장의 한계』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또 리처드 하인버그 박사는 세계적인 에너지 전문가이다. 비슷한 취지의 책을 차례로 읽은 것은 필자의 관심이 여기에 닿아 있기 때문일까?

   물론 이런 종류의 책들은 그동안 무수히 나왔다. 그리고 지금도 인류 사회의 미래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들이 전개되고 있다. 예컨대 ‘석유 정점’을 놓고도 비관론과 낙관론이 팽팽히 맞서 있다. 또한 인류의 역사 자체가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과거처럼 작금의 위기 요인들을 극복하는 방안들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앞의 저자들이 말하는 경고를 예사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우리는 기존의 성장 패러다임에 익숙해 있고, 가능하면 장밋빛 전망을 믿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적어도 ‘제로 성장 시대’는 아니더라도 ‘저성장 시대’가 미래의 대세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말 큰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구촌의 미래를 걱정하기에는 대한민국의 사정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 자원 빈국의 나라인 대한민국이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비교적 순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성장 시대가 불가피할 만큼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전성기를 이미 지났다면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장의 신화에 알게 모르게 깊이 빠져 있어 미래에 대한 대비가 소홀한 편이다. 정치 지도자, 관료, 학자 모두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들 스스로 기득권 구조에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 국가의 차원에서는 여느 나라와 다르게 높은 성장을 구가할 수도 있다.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잘 알다시피 이미 경제의 ‘성숙 단계’를 지나고 있어 성장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7퍼센트 성장을 장담했지만, 7퍼센트는 고사하고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실제 구매력 기준에서는 성장이 멈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책임일까? 오히려 세계 경제의 위기 국면에서 상당히 선방했다고 평가하는 편이 옳다. 앞으로 작금의 위기 국면이 어느 정도는 봉합되겠지만, 글로벌 수준의 성장 동력만큼은 크게 살아날 것 같지가 않다.

  

 
이런 전제 위에서 국가 전략을 짜는 것이 현명하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 행복 시대’를 주창하며 ‘창조 경제’와 ‘맞춤형 복지’를 주요 국정 과제로 내놓고 있다. 여기에 소요되는 많은 재원들에 대해서는 세목의 신설과 세율 인상을 통하지 않고 불요불급한 예산을 절감하고 제도적 감세의 축소와 탈세액에 대한 부과 강화를 통해 해결하려 하고 있다. 총론적으로는 올바른 방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박근혜 정부가 생각하는 만큼 세금이 걷히기는 어렵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그 수단이 어느 정도 확보되고 조세 당국이 애를 쓴다 하더라도 심상치 않은 경제 상황 때문에 무리수(?)를 두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리고 불요불급한 세출을 막기 위해서는 국회가 힘을 합해야 하는데, 그동안의 관행이 보여주듯이 국회의원들이야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오히려 방만한 재정 운용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창조 경제’는 지금이 저성장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다. 창조 경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겠지만, 필자는 그 의미를 ① 고부가가치형 미래 산업의 강화 ②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경제․사회 시스템의 구축 ③ 이를 위한 창의적 인재의 육성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이런 창조 경제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중장기적인 안목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5년 내내 줄기차게 추진하되, 그 성과는 이 정부가 끝난 후에 나타날 것이라고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창조 경제’는 어떤 점에서는 패러다임과 국가 전략을 바꾸는 일이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는 향후 40년의 전망과 처방을 담고 있다. 로마클럽이 펴낸 『성장의 한계』가 나온 지 40년을 염두에 둔 발상이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는 이런 정도의 긴 시간이 아니더라도 저성장 시대, 지식정보 시대에 맞는 대한민국의 미래 발전 전략으로 기능해야 한다.

   ‘창조 경제’의 일환으로 박근혜 정부는 미래창조과학부의 신설을 골자로 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 그런데 정부․여당과 야당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미래 창조는커녕 현재의 국가 현안을 처리하는 데도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정치권의 현주소를 웅변해 주고 있다. 아무리 박근혜 정부가 좋은 전략과 정책을 내놓는다고 해도 국회나 정치권의 수준이 이 모양이면 그 실현이 매우 어렵다.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환경이나 국민의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창조 경제’든 ‘알뜰한 재정 운용’이든 ‘지속 가능한 복지’든 박근혜 정부의 밑그림은 현실과 격차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 개혁과 시민의식 개혁이 여전히 중요한 것이고, 박근혜 정부가 이 일에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필요하다면 주요 권력 블록 간의 ‘국민대협약’을 체결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더라도 이런 정치력을 발휘하는 선결 과정 없이 밀어붙이면 그 부담은 결국 정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박근혜 대통령은 깨달아야 한다. ‘창조 경제’야말로 정부의 일방향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 그리고 민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과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창조 경제’의 성패는 박 대통령의 정치 리더십에 상당히 달려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저성장 시대의 도래는 ‘탐욕 경제 시대의 종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탐욕 경제는 뛰어난 과학기술에 의해 가능했지만, 이 과정에서 과거의 미풍양속과 휴머니즘의 전통이 많이 사라졌다. 물신주의 혹은 배금주의가 세계 전반을 오염시켰다. 환경 오염보다도 더 심각한 양상이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 성인군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인륜의 실종은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 최근에 학교 폭력 때문에 또 한 명의 소중한 어린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엇이 저런 비정하고 비인륜적인 학교를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 저런 학교를 이대로 방치해도 좋은가? 이 질문들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제로 성장보다는 비인간성의 만연을 더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 조상들에게는 ‘콩 한 조각이라도 이웃 사람들과 나눠 먹는’ 미덕이 있었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른들로부터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다른 아이들을 무조건 이기라는 교육을 학교도, 학부모들도 똑같이 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 경쟁지상주의 혹은 이기주의가 교육과 사회 전반을 계속해서 짓누른다면 대한민국은 미래 창조는커녕 현실 파괴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대로는 ‘더 나은 미래는 오지 않는다.’ 아니 더 우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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