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 / 디자인 최윤수 수습]

▶ 김홍도
▶ 출생-사망 / 1745년 ~ 1806년(?)
▶ 시대 / 조선시대
▶ 활동분야 / 화가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에 활약한 단원 김홍도는 도화서화원이 되어 어진과 초상을 그려 당대 최고의 가로 자리 잡았고, 단원화풍을 구사해 조선 후기 화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 도화서화원이 되어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그리다
김홍도는 1745년(영조 21년)에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화원이 되었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려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후 1781년(정조 5년)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을 그릴 때 한종유, 신한평 등과 함께 동참화사로 활약했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했다.

- 영·정조 시대에 활약하며 여러 장르에 뛰어났던 김홍도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는 조선 왕조의 문예부흥기라 일컬어지는 영·정조 시대에 활약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김홍도는 서민적인 풍속화를 그린 조선시대의 화원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는 조선후기의 화원으로 여러 장르에 뛰어났다. 그는 진경산수화, 풍속화, 도석인물, 화조화, 영모화, 초상화 등은 물론 사대부들만의 자존심이었던 사군자와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걸쳐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 정조의 초상을 그려 연풍현감에 오른 김홍도
1791년 김홍도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다시 한 번 참여했고, 그해 12월에 포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됐다. 이는 당시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종6품에 해당하는 최고의 직책이었다. 이렇게 김홍도는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후 김홍도는 충청위유사 홍대협이 조정에 올린 보고가 발단이 되어 3년 만에 연풍현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 과감한 생략과 필묵의 구사로 단원화풍을 구사
이후 1795년 서울로 올라온 김홍도는 그림에만 몰두했다. 이때부터 ‘단원화풍’이라 불리는 명작들을 그려냈는데, 그중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대작으로 꼽힌다. 또 우리나라 진경산수를 그린 ‘을묘년화첩’과 ‘병진년화첩’은 온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명작으로 불린다. 그는 대가다운 과감한 생략과 거침없는 필묵의 구사로 단원 산수화의 화풍을 드러냈다.

김홍도는 말년에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 풍경을 사생했다. 그는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 등을 더해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은 일상사를 그려내기도 했다.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한 김홍도는 조선 후기 화단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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