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 시대 찰리 채플린과 쌍벽 이룬 ‘버스터 키튼’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무성영화 시대 찰리 채플린과 쌍벽 이룬 ‘버스터 키튼’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 보도본부 | 최지민 pro
  • 승인 2020.06.28 14: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선뉴스 조재휘 / 디자인 최지민]

▶ 조셉 프랭크 키튼(Joseph Frank Keaton)
▶ 출생-사망 / 1895. 10. 04. ~ 1966. 02. 01.
▶ 국적 / 미국
▶ 활동 분야 / 영화배우, 영화감독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이었던 ‘버스터 키튼’은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 로렐과 하디와 무성영화를 이끌던 전설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스턴트 액션의 대가이자 대부로 무성 영화 시대 코미디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떡잎 때부터 드러난 재능
버스터 키튼은 1895년에 태어나 본명은 조셉 프랭크 키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유명한 보드빌 희극배우였기에 키튼은 어려서부터 희극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키튼은 어릴 때부터 부모와 함께 공연을 했으며 주변 사람들이 아동학대로 부모를 신고할 정도로 위험한 슬랩스틱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냈다.

영화계로의 데뷔 - 무성 영화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의 쇼가 중단되자 1917년 당대 유명 코미디언 로스코 아버클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 데뷔한다. 이후로도 키튼은 <러프 하우스>를 비롯해 <결혼첫날밤>, <허튼소리> 등 아버클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와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쌓았다. 1920년 아버클이 장편영화로 옮기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키튼에게 넘겼고, 키튼은 이때부터 자신만의 영화들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제작자 시절
키튼은 자신의 최초의 장편영화인 <세 가지 시대>를 필두로 <우리의 환대>와 <제너럴>에 이르는 작품들을 연출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제너럴>은 현재 키튼의 최고작으로 꼽히고 있지만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해 흥행에서 실패했고 키튼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경제적인 위기로 독립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포기한 키튼은 대형 영화사였던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와 계약했다.

배우로서의 삶 - 발성 영화
MGM과 계약한 이후, 곧이어 발성 영화가 도입되면서 키튼은 동료 배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기를 위해 발성 영화에 나오게 되었다. 키튼은 MGM에서 기획한 뮤지컬 영화인 <할리우드 리뷰 오브>와 기타 여러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목소리 문제, 영화사와 불화 등의 여러 요인으로 MGM에서 해고되었다.

몸 개그의 원형 창조
1951년부터는 TV 방송 시대가 시작되자 키튼은 자신이 아직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TV에 적극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의 슬랩스틱은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다시 주목받았고 특히 1952년, 찰리 채플린의 자전적 영화 <라임라이트>에서 채플린의 보조 피아노 연주자 역할을 맡은 것이 유명하다.

위대한 배우 눈을 감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스티븐 손드하임 원작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로마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으로 이 작품 역시 호평을 받았으며 1965년에는 베니스 영화제에 초대되어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러다 1966년 2월, 키튼은 폐암으로 눈을 감았다.

성룡이 가장 존경하고 영감을 많이 받은 배우이자 감독인 ‘버스터 키튼’.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희극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던 그의 업적은 지금 시대의 배우들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하다.

연예·스포츠 인기뉴스
오늘의 주요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