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63년 10월 15일 군정기관을 통해 권력기반을 확보한 5.16 주체들과 박정희 후보는 총 5명이 입후보한 대통령선거에서 총투표의 42.6%인 470만 2642표를 얻어 윤보선 후보보다 불과 15만 6028표 차이로 승리하게 된다. 이로써 박정희의 시대인 제3공화국(1963~1972)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963년 12월에는 제6대 총선이 치러졌다.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이 총투표의 32.4%를 얻어 대통령선거 때보다 더 낮은 득표율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수에서는 전체 175개 의석 중 110석으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다. 이는 야당이 11개로 분열되어 있었고 선거구당 평균 6명의 후보가 출마하는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야당의 이런 오합지졸 같은 모습은 박정희정권이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것을 견제하지 못하고 쳐다만 봐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한다.

제3공화국은 출범하자마자 곧 ‘경제제일주의’와 ‘조국근대화’를 구호로 내걸고 경제건설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에 최우선을 두었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대외적으로 미국과 일본과의 우방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쿠데타로 일으킨 정권의 빈약한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1965년 6월 22일 박정희정부는 미국의 수교 요구와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본 확보를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문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의 여부가 국민의 관심이었지만 김종필이 일본 오하라 외상과 비밀교섭을 하여 ‘독립축하금’이라는 형식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재정차관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낙착(문제를 결론 냄)하였다. 일제 강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 교섭은 여론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6.3 사태가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1964년 6월 3일, 굴욕적인 한 일 회담에 대하여 학생과 국민들은 거세게 반대하며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박정희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1965년 6월 22일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박정희정권이 굴욕적인 한일 회담 반대시위로 위기에 직면하던 과정에서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이 발생하였다. 1964년 8월 15일 중앙정보부는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미군 철수와 남북 서신, 문화, 경제,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북한의 노선에 동조하면서 인민혁명당을 결정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혁신계를 탄압한다.

그리고 1967년 7월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 등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조작하였는데 이를 ‘동베를린 사건’ 또는 ‘동백림 사건’이라 부른다.

그리고 미국의 요구에 의해 박정희 정부는 1965년에서 1973년까지 베트남에 파병을 하게 된다. 한국군은 미군의 동맹군의 자격으로 건군 이래 최초로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하게 된다(1965. 10). 이후 5만 5천여 명의 전투병이 베트남 내전에 참여하였는데 야당은 젊은이의 피를 파는 행위라 비판하였고 실제로도 많은 장병들이 희생되었지만 한국의 경제 발전에는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베트남 파병은 1966년 3월,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장비,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브라운 각서’를 대가로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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