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 디자인 이연선 pro]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이 구절은 80년대 대표 운동가요 ‘사계’의 한 부분이다. 이 노래는 당시 산업화의 보이지 않는 강요 속에 꽃이 피고 봄이 와도 그저 ‘미싱(재봉틀)’만을 돌려야 했던 섬유공장 속 청춘들의 근로 환경을 묘사해 큰 호응을 이끌어 냈다.

당시는 국내 2차 산업의 부흥기였다. 이렇게 산업은 발전했을지라도 각종 일터의 일꾼들은 보통 13시간 이상 되는 고강도의 근무를 하며 수많은 직업병을 앓기도 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4차 산업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현재, 현대인들의 근무 환경은 과거 ‘미싱’을 돌리던 그 청춘들과 다른 현실일까. 안타깝지만 ‘아니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죽하면 현대인들의 과도한 업무를 지칭하는 ‘크런치모드’라는 말도 생겨났다.

‘크런치모드’는 최근 야근이 잦은 업계의 은어로, 마감일정을 맞추기 위해 야근과 철야 작업을 반복하는 일 패턴을 말한다. 여기서 크런치는 '깨물어 부순다'는 뜻으로 직역하면 '크런치 모드'는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 상태를 뜻한다.

이 같은 크런치모드는 특히 IT업계를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모바일 게임 시장의 성장에 개발 경쟁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게임 업계에서 크런치모드의 근무 형태를 많이 보이고 있다. 특히 소비자의 취향과 요구에 꾸준히 맞춰야 하는 모바일 게임 특성으로 인해 종사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크런치모드의 근무를 하고 있다. 심지어 한 대표 업체의 경우 사옥이 속한 지역에서 ‘등대’로 불릴 정도이다.

물론 IT업계 뿐 아니라 수많은 업종에서도 과도한 근무 경향을 보이는데, 그래서일까 대한민국 국민은 아직도 OECD 평균보다 1년에 43일이나 더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렇다면 오래 일하는 대한민국 산업 현장의 능률은 높을까? 안타깝게도 회사에 오래 머무르고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생산성은 OECD 꼴찌 수준이다. 근무시간과 생산성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는 산업/ 근로 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손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크런치모드의 문제는 비단 업무시간 대비 낮은 효율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현대인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에 있다. 우선 과도한 업무가 계속 이어지는 근로자의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심혈관 질환, 뇌질환 등 위험에 빠지기 쉬운데, 실제 하루 13시간 이상 근무자는 뇌출혈 위험이 2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업무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보면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삶의 질까지 저하시킨다. 그래서 일까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는 야근을 살충제 성분인 DDT와 나란히 '2군 발암물질'에 올렸다. 즉 크런치모드는 발암 물질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근로자의 근무형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과도한 야근이 지속되는 근로자의 근무 상태를 지칭하는 ‘크런치모드’. 효율적이지 못하고 근로 시간만 긴 ‘크런치모드’는 한국인을 빨리 시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이러한 근로 환경의 매듭은 풀기 힘든 우리 사회의 과제로 남아있다. 산업 전반에 걸쳐 많은 근로자를 병들게 하는 근무 형태가 사라지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삶과 경제의 질이 높아질 수 있는 뾰족한 대책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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