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에 희망은 있는가
중국 작가 루쉰(魯迅)은 “희망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 위에 나 있는 길과 같다. 사실 길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면 길은 만들어진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길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국가나 사회의 시스템이 잘 갖춰져야 하고, 지도자의 리더십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법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곧 ‘희망을 향한 끊임없는 전진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국민이 그 숱한 고난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에 더 나은 삶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그 때에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성공이 성공을 부른 것이다.

근대화가 시작된 지 51년이 지난 오늘, 과연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샘솟고 있는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문 편이다. 더 이상의 양적인 팽창은 기대하기 어렵고,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 또한 힘겹기 짝이 없다. 그 곤궁했던 시절에도 살아 있었던 나눔의 정신은 실종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현재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과제들을 안고 있지만, 희망의 빈곤이야말로 가장 큰 숙제이다. 희망이 부족하고서는 국민적 에너지를 모을 수 없다. 각종 갈등들을 수습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내일의 주인공인 미래 세대의 활력과 동력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난점이다. 우리 청소년들의 행복지수가 OECD 국가 가운데 매년 꼴찌라는 사실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희망 찾기는 여러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다. 혹자는 우리 사회의 경쟁양식이 좀 더 공정한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지나친 빈부 격차를 완화하고 패자들의 재도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복지제도를 확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성장 동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작금의 대량생산-대량소비 사회를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 모두 일리 있는 내용으로서 어떤 식으로든 대한민국의 비전 수립에 반영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정치 리더십이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가 다양한 국민적인 기대를 잘 수렴해서 최적의 대안을 도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 정치는 이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왔고, 깊은 불신의 늪에 빠져 있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치권이 미래 비전에 대해 손 놓고 있었다고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나름대로는 고민을 했을 터이고, 제한적이나마 성과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복잡하고 역동적인 시대를 이끌어가기에는 역부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점에서는 정치권이 시대 흐름에 가장 뒤처지는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다른 분야에 비해 발전의 지체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의 가장 소중한 덕목이라 할 ‘대화와 타협’에 능한 것도 아니다. 정당마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처방전은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은 오만과 독선, 당리당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대통령과 여당은 집권 세력이라는 미명 아래 밀어붙이기를 즐기고, 야당은 선명성과 투쟁성이 곧 미덕인 양 ‘반대를 위한 반대’에 익숙해 있다.

우리 정치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인과 대리인의 역전 현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주인인 유권자의 권익보다는 대리인인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더 골몰한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데는 그동안의 각급 선거가 ‘최선’이나 ‘차선’의 선택이 아니라 ‘차악’의 선택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질적인 전환 없이 구태 정치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주목받고 있다. 과연 이번 대선은 대한민국의 희망을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세 명의 유력 후보들은 그 일에 적임자인지를 우리 국민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사실, 그 많은 사회적 비용을 소요하면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는 가장 큰 의미는 이런 데 있다. 제18대 대선마저 단순한 대통령 얼굴의 교체에 그친다면, 대한민국의 희망 찾기는 상당 기간 유보될 수밖에 없다.

우선, 후보들마다 내놓는 정책이나 공약은 부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야심차게 내놓는 공약들은 대부분 재원 대책이 빠져 있다. 타당성과 실효성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매니페스토 운동이 절실한 까닭이다. 또 야권 후보들은 ‘4대강 보’를 철거하겠다는 식의 무책임한 발언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언필칭 보수 정당의 박근혜 후보조차 대중영합주의 공약을 서슴지 않는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네거티브 캠페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권은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와 ‘여성 대통령 후보론’에 대해, 새누리당은 야권 후보 단일화 추진과 야권 후보들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맹공을 아끼지 않고 있다. 부분적으로 그런 네거티브 운동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미래 비전 경쟁이 실종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남은 한 달 동안 이런 흐름이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

캠페인은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세 명의 후보들이 이 전환기의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만한 리더십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리더십의 덕목은, ① 국가 미래에 대해 얼마나 큰 포부를 갖고 있느냐, ② 다른 진영과 생각에 대한 포용력이 있느냐, ③ 국민 대중과 어느 정도 소통․공감할 수 있느냐이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구비해야 할 요건이 있겠지만, 이 세 가지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아닐까.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국가 경영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했고,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입문해서는 당 대표를 지내면서 위기관리 능력을 입증한 바 있다. 남다른 품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정치 경력에 상응하는 비전의 지도자인지는 미지수이다. 가장 큰 의문점은 포용력과 소통·공감 능력인데, 그렇게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정치권 입문 전부터 훌륭한 인품과 유연한 사유 능력을 갖고 있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 경위야 어떠하든 정치권 초년생에 불과한 문 후보가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잠재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 후보는 정치 경력이 일천해서인지 대통령 후보로서 준비가 부족한 것 같다. 포용력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요즘은 진영의 정서를 의식해서인지 배타적인 모습을 종종 보여주고 있다.

안철수 후보는 IT 전문가 시절부터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 꿈과 비전을 얘기해 왔다. 이런 것들이 축적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친다는 중평(衆評)이다. 원론에 가까운 얘기들은 많지만, 가슴에 와 닿는 내용들이 적다는 지적들이다. 자신의 중도적 포지션 때문에 포용력이 강할 것 같았는데, 새누리당에 대한 폄훼는 이런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있다. 소통·공감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 있는데, 중·장년층에 대해서도 마음의 문을 열 필요가 있다.

요컨대 필자의 눈에는 마음에 드는 후보가 한 명도 없다. 그렇다고 슈퍼맨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제사회에 내놓을 만한 지도자 감이 전무하다는 느낌이다.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차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다. 차악의 선택이라 하더라도 필자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필요조건에 가장 근접한 후보가 선택될 수 있다면 좋겠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는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 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만, 원모심려(遠謀深慮)의 안목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품격을 가진 대인(大人)을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맞이하는 것은 정녕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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