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디자인 이연선]

▶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 출생-사망 / 1743. 4. 13. ~ 1826. 7. 4.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정치, 교육, 철학

토머스 제퍼슨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미국 독립선언문의 기초 위원으로 미국 건국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 제퍼슨의 어린 시절
제퍼슨은 부유한 농장주이자 토목기사인 피터 제퍼슨과 제인 랜돌프의 아들로 태어나 민주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흥미를 갖고 평생 연구를 계속했으며 외국어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1767년 변호사가 되었지만, 법률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1769년 식민지 의회의 하원 의원이 된다. 당시 버지니아를 비롯한 식민지들은 영국의 식민정책에 반대하여 끈질긴 투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제퍼슨은 거기에 저항하는 패트릭 헨리 등과 손을 잡고 그 집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 독립선언문 기초
1776년 제퍼슨은 대륙회의의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발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존 애덤스도 기초위원이었지만, 제퍼슨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고 그에게 거의 모든 작업을 맡겼다.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에 표현된 이상을 상징하는 유일한 인물이 된 것은 독립선언문을 썼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헌신적인 조국애 덕분이었다.

제퍼슨은 1779년 독립전쟁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가 되었고 봉건적인 제도들을 폐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비상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으며 은퇴한다. 그리고 1782년 다시 공직으로 돌아와 버지니아 대표로 몇 개월 동안 대륙회의에 참석했다.

- 해밀턴과의 대립 구도
1789년 대통령이던 조지 워싱턴은 제퍼슨에게 새 정부의 국무장관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워싱턴 행정부의 재무 장관은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는데, 제퍼슨은 해밀턴의 정책이 중앙정부의 헌법상 권한을 넘어섰고 국민 대다수 이익에 위배되며 공화제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맹렬히 반대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고 제퍼슨은 여전히 민주공화파의 지도자였고 해밀턴은 연방파의 상징이었다. 연방파의 존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1796년 선거에서 제퍼슨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대통령으로 취임
1800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연방파는 패배를 맛보았지만, 민주공화파가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제퍼슨과 애런 버의 득표수가 공교롭게도 똑같았기 때문에, 결국 하원이 결선투표를 하여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재임 중에는 소수의견을 존중하고 종교, 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위해 애쓴다.

- 루이지애나 매입과 은퇴
그리고 1803년 제퍼슨은 나폴레옹 1세로부터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 그 결과 미국 영토는 거의 2배로 늘어났고 루이지애나에서 강대국 프랑스의 권력이 물러났기 때문에 국가는 더욱 안정되었다. 제퍼슨은 1804년 대통령으로 재선되어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중립 정책을 유지했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고 1809년 정계에서 은퇴한다.

이후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고 스스로 학장에 취임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도록 노력했으며 그가 기초한 독립선언문과 인권 사상은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그는 헌법에서 규정한 공화제와 민주제를 엄수했으며, 그의 정치적 실천은 미국을 한층 더 안정시켰다. 제퍼슨은 정치가로서 그 시대의 위인이었고, 계몽가로서 민주주의 사상가였다.

생전 직접 준비한 묘비명 : 미국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이자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제안자,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