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지영/ 디자인 이연선]

▶ 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
▶ 출생-사망 / 1923년 12월 2일 - 1977년 9월 16일
▶ 출생 / 미국 뉴욕
▶ 활동분야 / 성악가

그리스계 이탈리아의 소프라노 가수. 풍부한 성량과 다양한 레퍼토리, 천 가지 음색으로 연기가 가능해 ‘오페라의 여신’, ‘오페라의 성녀’ 등으로 불렸다.  

- 비관적인 생각이 음악에 몰두하게 하다

칼라스는 뚱뚱한 외모와 소극적 성격 때문에 어려서부터 주위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인생은 고통이며 끝없는 투쟁일 뿐’이라고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당시10대 소녀였던 칼라스의 이런 생각은 그녀를 오로지 음악에 몰두하게 만들었는데 이런 와중에 미국 대공황 이후 뉴욕에서 그리스 아테네로 거주를 옮긴 뒤, 음악 인생을 결정지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승 ‘엘비라 데 이달고’를 만나게 된다. 이달고는 칼라스에게 성악적 기교, 성악의 철학과 예술의 숭고함뿐 아니라 독특한 개성을 계발할 수 있게 가르쳤다.

-끊임없이 연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다

칼라스는 늘 이달고 곁을 지켰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큰 칼라스는 자신의 레슨 시간이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학생들이 레슨 받는 것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학생들의 지적사항까지 모두 자기 것으로 배우려고 하였다. 또한 칼라스는 부단한 노력으로 오페라의 주요 언어인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누구보다 빠르고 완벽하게 익혔다. 뿐만 아니라 이달고는 칼라스에게 벨칸토 창법을 전수하며 훗날 칼라스의 주요 장기가 된 배역들인 ‘청교도’의 엘비라 역,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 주역, 벨리니 ‘노르마’의 주역 등을 연습시켰다. 칼라스는 걸을 때나 버스에서나 이 벨칸토 배역의 기교와 장식음들을 연습했다.

- 데뷔 후, 무대에 서지 못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칼라스는 그리스 아테네 국립오페라 무대에서 첫 데뷔를 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 중에 노래로 적군에게 식량을 얻었던 일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칼라스는 아테네 국립오페라 극장과 재계약이 불발되고 만다. 일자리가 없어 고민하던 그녀는 뉴욕으로 향하지만 이곳에서도 배역을 얻어내려는 노력은 계속 실패로 끝난다. 어쩌다 친지를 통해 들어온 배역은 열다섯 살 게이샤인 ‘나비부인’ 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80kg의 몸으로 열다섯 살 연기를 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판단한 그녀는 이 또한 거절하게 된다.

- 세 사람과의 만남, 행운이 시작되다

칼라스의 첫 번째 행운은 사업가 ‘메네기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칼라스와 처음 만날 당시 오십대 초반이었던 메네기니는 세련된 교양과 예술적 감각으로 칼라스의 조언자이자 후원자 역할을 했다. 칼라스는 스물여섯에 메네기니와 결혼하면서 칼라스 시대의 막을 열었다. 두 번째 행운은 명지휘자 ‘툴리오 세라핀’과의 만남이었다. 세라핀은 칼라스에게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계약서를 가져다주었고, 이후 한 시즌에 바그너 ‘발퀴레’의 브륀힐데 역과 벨리니 ‘청교도’의 엘비라 역을 동시에 맡겨 이탈리아 오페라계를 열광하게 했다. 세 번째 행운은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와의 만남이었다. 칼라스는 그를 통해 좌파 예술가 및 지식인 그룹과 교류하며 정치, 예술,혁명, 새로운 윤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 오페라의 여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다

칼라스는 서른 살 무렵 체중을 30kg이나 감량해 오드리 헵번 스타일까지 소화하며 오페라의 여신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후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지면서 전남편과 이혼하고 두 번째 남자와 결혼하게 되지만 결국 오나시스와도 파경을 맞게 된다. 이 일로 칼라스는 끊임없이 매스컴의 표적이 되었고 1977년, 약물중독과 우울증을 앓고 있던 그는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심장 마비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목을 긁는 듯한 쇳소리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감정을 담은 천 가지 음색의 연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마리아 칼라스. 그녀의 유해는 고향 바다에 뿌려졌지만 어떤 가수와도 비교하기 힘든 그녀만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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