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태웅] 1938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해 옮겨졌던 광명문(光明門)이 80년 만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광명문의 원래 자리는 어디인지, 덕수궁 구석으로 옮기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덕수궁의 남서쪽 구석에 홀로 서 있는 광명문. 현재는 몇몇 유적들을 전시하고  비를 맞지 않게 도와주는 일종의 야외전시관 역할을 하고 있지만, 본래 덕수궁 광명문은 왕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덕수궁 남서쪽에 위치한 광명문 [출처_Pixabay]

덕수궁은 본래 경운궁이라고 불렸다. 1608년 조선의 15대 왕이었던 광조가 이 곳에서 즉위하면서 처음으로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 세월이 지나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1년 뒤, 러시아 공사관에 피해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그해 9월 대한제국을 세우고 경운궁은 제대로 된 궁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고종의 즉위 동시에 경운궁에는 왕의 침전인 함녕전이 만들어졌는데, 바로 이때 함녕전의 남쪽 문인 광명문도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1904년에 경운궁에 큰 화재가 나 한 차례 소실될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 광명문은 훼손 없이 유지됐다.

그러던 중 1938년, 조선총독부가 석조전 서관을 증축해 이왕가미술관을 개관하면서 광명문은 남서쪽 구석인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그리고 광명문 내부에는 물시계 국보 제 229호 자격루와 보물 제 1460호 흥천사명 동종이 전시되면서 더 이상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2016년 광명문이 원래 있었던 자리에서 발굴공사를 진행해 광명문의 자취를 확인했으며, 겨울이 지나고 3월부터 올해가 가기 전까지 이전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이전 방식은 목조 건축의 특징을 살려 해체 후 원래 자리에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광명문의 이전 공사와 동시에 내부에 전시 되어있던 자격루와 흥천사명 동종의 보존처리 절차도 시작된다. 두 유물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년간 보존처리를 할 예정이며, 그 기간 동안 추후에 전시할 마땅한 장소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광명문은 일제치하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는 역사유적이다.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광명문의 원래 자리로 하루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광명문을 원래의 위치로 옮긴다는 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유물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과거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회상시키고, 후대에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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