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병용 / 디자인 이연선]

▶ 나폴레옹 1세(Napoleon I)
▶ 출생-사망 /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
▶ 국적 / 프랑스
▶ 활동분야 / 정치, 군사

프랑스 하급귀족 출신으로 제1통령과 황제를 즉위하며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고, 유럽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세력을 넓혔다.

-코르시카 시골 소년, 군인이 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령 섬에 속하는 코르시카 아작시오의 하급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다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며 처음으로 군인이 되었다. 이후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그의 아버지와 친한 파올리의 밑에서 코르시카 국민군부사령에 취임을 하게 된다. 이후 1792년 파올리와 결별하고, 일가 모두 프랑스로 이주를 하였다. 1793년 왕당파 반란군을 토벌해 최초의 무훈을 세우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을 프랑스에 알린 사건,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무훈을 세우며 프랑스 내 이름을 알리던 나폴레옹은 반란 진압에 참여하라는 정부의 요청을 거절하여 직위를 해제당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으로 다시 이름을 알리며 복귀하게 된다.

‘포도달 13일의 폭동’이라고도 불리는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은 나폴레옹이 파리 시내에서 포도탄으로 왕당파의 반란을 강경 진압한 사건이다. 반란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나폴레옹은 중장으로 진급하며 ‘포도달 장군’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나폴레옹,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되다

잇따른 활약으로 이탈리아 방면군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은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나폴레옹의 인기를 견제하려는 당시 혁명정부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요구하는 나폴레옹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계획이 생각처럼 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다시 프랑스로 귀국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난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인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다. 귀국 직후 이를 본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와 손잡고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이 된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 법전인 ‘프랑스 민법전’을 편찬하는 등 내정 면에서 일대 개혁을 실시했다.

-하급귀족 출신 소년, 황제가 되다.

제1통령이 된 이후 나폴레옹은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하였고 1804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교황에게 대관을 받아 나폴레옹 1세에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지지하던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나폴레옹을 지지하던 베토벤 등의 예술인들도 그에게 헌정하려던 곡을 폐기하는 등 지지를 철회하는 행보를 보였다.

- 나폴레옹의 몰락, ‘워털루(Waterloo) 전투’

황제 즉위 후 영국을 압박하려던 나폴레옹은 오히려 열세에 몰리게 된다. 잇따른 나폴레옹의 패배에 실망한 프랑스 국민들은 각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1814년, 결국 나폴레옹은 황제직에서 퇴위 되어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된다. 이후 루이 18세가 황제로 즉위하지만 루이 18세의 무능함에 실망한 프랑스 시민들은 다시 나폴레옹을 데려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은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Waterloo)에서 자신의 사활이 걸린 ‘워털루 전투’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마저 패하고 만 나폴레옹은 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 Island)로 유배되고 1821년, 6년의 유배 끝에 유배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명언을 남긴 나폴레옹. 그의 말대로 그는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모르는 것처럼 범세계적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비록 영국 지배라는 꿈까지 실현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탁월했던 전투 능력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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