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승재 / 디자인 이연선 pro]

▶ 한나 아렌트 (hanna Arendt)
▶ 출생-사망 / 1906년 10월 14일 ~ 1975년 12월 4일
▶ 국적 / 독일
▶ 활동분야 / 철학자
▶ 수상 / 레싱상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 사상가이며,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한나 아렌트. 1,2차 세계 대전 등 세계사적 사건을 겪으며 전체주의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 그녀에 대해 알아보자.

- 조숙하고 명석한 유대인 소녀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집에서는 ‘유대인’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학교에 입학하면서 유대인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친구들의 놀림에 대한 충격과 외동딸이었던 한나 아렌트를 어엿한 독일 시민으로 키우려는 부모의 교육열은, 아렌트가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단 책에 빠져들게 만들게 했다. 아렌트는 16세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 큰 영향을 받았고, 같은 유대인 여성이면서 대표적 사회주의 사상가인 로자 룩셈부르크를 우상으로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명석했던 아렌트는 가정교육과 대학교 청강을 거쳐 1924년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스승이자 연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하이데거의 영향은 그의 사상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 하이데거와 유사하지만 다른 아렌트의 철학

하이데거는 인간은 본래 이성적 존재이자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개별적인 욕망과 필요에 좌우돼 언제나 삶에 치이며 죽음이라는 유일한 절대적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존재로 보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개인의 주관성을 신성시해 전통과 종교에 속박당하기 싫어하지만, 근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극복하고자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기술과 사회의 틀에서 찰나적 욕망만 쫓아간다고 봤다. 아렌트 또한 이런 문제의식을 받아들였고, 근대의 인간은 좋은 삶을 꿈꾸기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만든 괴물의 노예와 같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하이데거와 아렌트는 다른 견해를 보인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과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모색했지만, 아렌트는 인간의 자유는 정치적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참여를 제한하고 모든 사람의 의견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파시즘은 정치가 아닌 폭력이라 비판했다. 하이데거는 나치즘을 근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돌파구라 여긴 반면, 아렌트틑 파시즘에 맞서 싸운 것이다.

-프랑스, 미국으로의 망명과 나치즘에 대한 투쟁

1933년 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면서 아렌트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일주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다음 프랑스로 명명했다. 이후 아렌트는 1941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며 반 나치 운동 등에 참여했다가 프랑스가 독일에 유린되면서 수용소로 보내졌다. 여기서 가까스로 탈출한 아렌트는 또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미국에 가서야 비로소 생활이 안정된 그녀는 본격적으로 학술 연구에 돌입하는데, 1951년 내놓은 <전체주의의 기원>은 일약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서로 정반대의 이념을 가진 듯 한 파시즘과 사회주의 체제를 ‘전체주의’라는 틀로 묶고, 이들은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광기와 공포로 지배하는 정치형태라고 주장했다. 아렌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서방에서 큰 반응을 얻었고, 여러 사회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줬다.

-근대의 ‘동물적인 삶’의 탈피를 위한 ‘공공성’ 강조

인간의 자유를 찾는 방법으로 정치를 제시한 아렌트는 ‘공공성’을 강조했다. 1958년 인간의 조건이라는 저서에서 그녀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활동으로 구분했는데 노동은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해 하는 행동, 작업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일의 재미와 명예를 바라는 행동, 행위는 공동체 속에서 어떤 대의를 위해 하는 행동을 말한다. 아렌트는 근대의 인간은 노동에만 몰두해 이웃과 공동체를 돌보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고 지적하며 현대 사회에서 공공성을 새롭게 발견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그동안 정치 분석에서 인간의 물욕에만 중점을 두었던 사회계약론자들과 마르크스, 그리고 성욕에만 주목했던 프로이트와 달리 공적인 삶을 정치의 주제로 불러온 것으로 현대 정치사상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이히만을 통해 발견한 ‘악의 평범성’

1960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정보부에 잡혀 이스라엘로 압송됐다. 이 소식을 들은 아렌트는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재판과정을 취재하기로 했다.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하며 자신의 저지른 일과 책임을 연결시키지 못한 채 웃음을 지어보였다.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에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아렌트는 이 보고서에서 아이히만이 그동안 저지른 범행에 비해 너무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여기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이끌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뿐인데, 우리가 일상성에 묻혀 ‘누구든 이렇게 하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평범하고 선량한 우리도 언제든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우리가 세상을 보다 선하게 만들고 싶다면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영예와 슬픔이 엇갈린 그녀의 마지막

1960년대 말, 유대인들의 비난이 잦아들면서 그녀의 사상과 학술 가치는 점점 더 높게 평가됐다. 프로이트 상, 소니그 상 등을 수상하고, 세계 각국에서 그녀에게 강좌와 교수직을 제의해왔다. 하지만 1969년에 자신의 스승이었던 야스퍼스가 죽고, 이듬해 남편까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결혼 생활에서 자녀가 없었던 아렌트는 책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로만 쓸쓸함을 달랬다. 가끔 유럽에 은둔하고 있던 옛 연인 하이데거를 만나기도 했는데 정치적, 사상적으로 뜻이 달라 결별하긴 했지만 하이데거의 사상에 변함이 없다며 일종의 화해를 하게 됐다. 이렇게 쓸쓸히 지내던 아렌트는 <전시의 삶>이라는 책을 거의 마무리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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