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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3 붕당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도입한 ‘영조’ [키워드 한국사]
  • 뉴스제작국 | 이호 기자
  • 승인 2016.06.19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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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숙종의 환국정치(경신환국)로 인해 서인은 결국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인해 서인에서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이들의 대립은 또 다른 붕당정치를 낳았다.

   
 

숙종의 뒤를 이어 희빈 장씨의 아들인 왕세자(훗날 경종)와 연잉군(훗날 영조)는 서로 다른 당을 등에 업고 왕위 경쟁을 해야 했다. 왕세자는 남인에 동정을 보내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고 연잉군은 강경책을 폈던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왕세자는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하여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당하고 심지어 사사 당한 장씨의 아들이었고, 연잉군은 세력이 강한 노론의 지지를 받고는 있지만 천인인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희빈 장씨를 축출했던 노론은 왕세자가 보복을 할 것을 우려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결국 왕세자는 왕위에 올라 경종이 되었다. 하지만 희빈 장씨의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서 겪은 영향인지 경종은 심신이 허약했고 이를 이유로 노론은 연잉군을 왕세제에 올렸다. 또한 계속해서 왕세제가 대리청정을 하게끔 경종을 압박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이 약하다 해도 왕위에 올라있는 자신을 무시하는 노론의 행동에 경종은 결국 대노하였고 소론과 함께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을 유배시켜버린 신축옥사(1721)를 일으킨다. 또한 다음 해(1722)에는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는 소론 측의 공격으로 4대신과 60여 명의 노론이 처형을 당하고 170여 명이 유배를 가는 임인옥사가 일어난다.

이 사건들로 인해 왕세제 역시 목숨을 위협받지만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요절해 왕세제는 겨우 영조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1724)

영조는 출신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어머니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면서 노론의 지지를 받은 점과 경종의 요절은 소론이 그에게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경종을 독살했다’는 공격을 하게 만들었다.

이 공격은 점점 심해지더니 1728년, 소론 중에서 과격론자였던 이인좌가 정희량, 이유익 등 일부 소론 세력과 정권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이인좌의 난).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 명에 이르렀던 이 대규모 난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왕위에 올라서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 영조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되었다.

이렇듯 붕당간의 피비린내 나는 세력 다툼이 국정 운영에 큰 해가 된다고 느낀 영조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하고 해소시키는 ‘탕평책’을 실행하게 된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어 신축옥사, 임인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지만 다시 노론에서 소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과격론자들을 쫓아내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국운영을 해나갈 수 있는 탕평론자들을 등용했다.

탕평이라는 말은 ‘홍범조(洪範條)’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 ; 치우치거나 무리 짓는 것이 없으면 왕도가 평안해 진다)라는 글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조는 탕평책에 의거해 노론과 소론의 대표자들을 화해시키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축출시켰다. 그리고 영의정이 노론이면 좌의정은 무조건 소론으로 하여 균형을 맞추는 인사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는 탕평책이 안정되어 가면서 당색이 아닌 재능만을 보고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으로 발전되었으며 갈등을 촉발시킬 수 있는 유생들의 당론에 대한 상소를 금지시켰다. 또한 이조전랑이 가진 삼사의 인사권을 철폐시켰고 성균관에 탕평비까지 세우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영조의 이런 노력을 통해 중앙 정계에는 과거와는 다르게 노론과 소론, 남인과 소북 등 4색 당파가 균형을 이뤄 조화롭게 등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지지로 왕좌에 오른 영조의 탕평책은 아무래도 노론에 어느 정도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조선 왕조 최대의 비극이 발생하는데... 

이호 기자  dlghcap@sisu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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