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인천상륙작전의 리더 ‘더글라스 맥아더’는 누구인가
[카드뉴스] 인천상륙작전의 리더 ‘더글라스 맥아더’는 누구인가
  • 보도본부 | 박진아 기자
  • 승인 2019.08.23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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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박진아 / 디자인 김미양] 검은 보잉 선글라스와 입에 문 파이프, 황토색의 전투복. 1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 이르기 까지 현대의 전장을 거침없이 누볐던 군인. 

장군의 위치였지만 최전방에서 참호 습격에 앞장 설만큼 용맹했고, 5000분의 1의 확률에도 과감히 작전을 이끌어 나갈 만큼 담대했던 영웅.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한국전쟁에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바꿔놓은 바로 그 사람. 더글라스 맥아더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낙동강 방어선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던 시기에 전세를 단번에 바꿔놓은,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천 상륙 작전’입니다. 

이 작전을 이끈 리더,우리에겐 용맹함과 대담함을 지닌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맥아더. 그의 할아버지는 남북 전쟁에서 북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고, 그의 아버지 또한 필리핀 반군과의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맥아더에게도 군인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죠. 

1893년 텍사스 군사학교에 입학했고, 6년 뒤에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수한 성적을 보인 맥아더는 여러 전장을 돌아다니며 성과를 인정받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미군 최연소 사단장이 되었고, 이후 1925년에는 최연소 육군 소장, 5년 뒤에는 육군 참모 총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됐는데요. 그렇게 빠르게 지위가 오르던 맥아더는 1937년까지 필리핀의 최고 군사 고문으로 활동하다 전역했습니다. 그 후에는 필리핀 육군 원수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죠.

그로부터 2년 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참전을 자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최고 사령관이 된 맥아더. 하지만 이때 맥아더는 일본군에 처참히 패배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당시 패배의 전략을 고집해 더 큰 피해를 입게 되죠. 심각한 피해를 입은 맥아더는 결국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호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호주에서 미국과 호주의 연합군을 재정비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다시 필리핀을 탈환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 때 맥아더의 활약은 물론 승리를 가져왔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리 좋지 못한 평을 받습니다. 필리핀이 가지는 군사적, 지리적 가치를 위했다기보다는 자신이 과거 필리핀에서 당한 패배에 대한 명예 회복의 성격이 강했다는 이유에서였죠. 그런 이유때문인지 40만 명이 넘게 동원된 큰 전투였지만 2차 대전 역사책에선 이 전쟁의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맥아더의 고집은 한국 전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속수무책으로밀려난 상황에서 맥아더는 상황을 반전시킬 작전을 제안하죠. 바로 인천 상륙 작전입니다. 

주변에선 성공할 확률이 낮다며 만류했지만, 그는 꿋꿋이 그 작전을 밀고 나갔고 결국 북한의 병참과 보급을 끊어내 전세를 역전하기 이릅니다. 분명 그의 고집은 성과를 발휘했죠.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뛰어난 실력으로 빠르게 인정을 받은 더글라스 맥아더. 그가 나섰던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은 바로 맥아더의 강한 자신감과 고집이었습니다. 그의 넘치는 자신감과 때로는 과하다 싶은 고집은 우수하다 평가받던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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