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박진아 / 디자인 김미양] 위기에 빠진 나라. 혼란스러운 정세. 그 아래 핍박받는 국민들. 누군가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변절할 때, 나라를 위해 꿋꿋이 발걸음을 내딛은 지도자. 

“눈길을 걸어갈 때는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이 길을 걸어갈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바로 백범 김구입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 백범 김구. 사실 나라를 위한 그의 노력은 굉장히 그의 젊은 시절부터 쭉 이어져 왔습니다. 과연 그가 이렇게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광복절을 맞아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를 돌아봅니다.  

1876년 황해도 해주. 김구 선생은 경순왕의 자손인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조상이었던 김자점의 난으로 인해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해 양반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김구 선생의 가족. 

가난한 처지였음에도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을 가진 부모님의 모습은 김구 선생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죠. 그리고 부패된 세태에 큰 분노를 느낀 김구 선생은 18세에 독학에 입도합니다. 

김구 선생의 항일의식은 대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의병군 토벌에도 나서는가 하면, 1896년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와 왜병 중위 쓰치다를 맨 손으로 처단하기도 합니다. 

21세의 김구 선생이 국모의 원한을 푼 첫 거사였습니다. 물론 이 일로 사형의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고종의 특사로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이후 김구 선생은 교육 사업에도 전념했는데요.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과 을사조약을 맺게 되고 김구 선생은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 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3년 뒤 김구 선생은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했고,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더욱 맹렬히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1919년,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진행된 독립 운동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어려워지자 김구 선생은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렇게 상해에 도착한 김구 선생은 당시 임시 정부의 내무위원으로 있던 안창호를 찾아갔고, 경무국장으로 임명되게 됐죠. 

해외에서도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 겁니다. 1928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해 침체에 빠져있던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 운동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며, 1931년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 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잇달아 진행되고, 이러한 거사는 우리의 민족혼을 깨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는 등 군대를 조직해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을 준비를 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게 됩니다. 광복 후에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김구 선생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는데요.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 서울과 평양에는 각각의 정부가 수립됐죠. 이듬해 6월 26일, 김구는 자택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 평생을 나라의 독립과 국민의 안위를 위해 노력한 백범 김구 선생. 

우리가 지금 대한민국의 땅을 밟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김구 선생과 같은 독립과 애국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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