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 바비 브라운은 동양인, 백인, 흑인 등 모든 인종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잘 맞는 메이크업 제품들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당시 과한 메이크업이 유행이던 미국 뷰티업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바비브라운의 간편한 메이크업 제품들은 소비자들에게 친밀한 브랜드 이미지로 인식되어 꾸준히 주목 받아왔다.

메이크업 실력에 소질을 보인 바비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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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브라운은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자랐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아 어머니가 화장하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직접 따라했다. 1973년 그녀가 16살 때 시카고의 작은 화장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메이크업에 대한 공부를 익혀나갔다.

메이크업에 대한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바비 브라운은 보스턴의 에머슨 대학에서 무대 메이크업을 전공했다. 1980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그녀는 뉴욕에서 프리랜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메이크업 실력을 인정받아 유명 사진작가인 브루스 웨버, 아서 엘고트 등과 함께 미국판 보그(Vogue),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등 유명 패션지의 화보 메이크업을 함께 진행했다.

본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바비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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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바비 브라운은 1987년 보그 커버 페이지에 나오는 나오미 캠벨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면서 새로운 메이크업을 시도했다. 당시 뉴욕의 메이크업 업계에서 유행했던 과장된 메이크업과 달리 바비 브라운의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은 본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얼마 후 바비 브라운은 1990년 케언스 앤 어소시에이츠(Cairns & Associates)라는 PR업체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게 됐고, 1991년 그녀는 부사장인 로잘린드 랜디스와 함께 1만 달러를 투자해 ‘바비브라운 코스메틱스(BOBBI BROWN Cosmetics)’를 창업했다. 바비 브라운만의 ‘노메이크업 메이크업 룩(No-Makeup Makeup Look)’은 사람들 개개인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살려 새로운 트랜드를 만들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화장품을 선보인 바비브라운 코스메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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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브라운 코스메틱스를 설립한 이후 그녀는 먼저 자연스러운 색상으로 촉촉하게 입술을 유지시켜주는 립스틱들을 선보였다. 10가지 색상으로 구성된 ‘바비즈 에센셜 립컬러(Bobbi’s Essentials Lipcolor)’ 라인을 출시해 첫 날에만 1백여 개 이상을 판매해 성공적인 매출을 올렸다. 립 메이크업으로 유명해진 바비브라운 코스메틱스는 점차 다른 지역으로 매장을 확장했다.

1992년 바비 브라운은 누구나 자연스러운 피부톤을 연출하는 것을 강조하며 흑인, 동양인, 백인들이 모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파운데이션 라인을 출시했다. 그 후 아이섀도(Eye Shadow), 파우더(Powder), 브러시(Brush) 등의 다른 메이크업 제품들도 출시해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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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성장을 이룬 바비브라운 코스메틱스는 미국의 대형 화장품 그룹 에스티 로더에게 인수 제안을 받았다. 이에 바비 브라운은 CCO(Chief Creative Officer, 최고창의력책임자) 직책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바비 브라운은 쉽게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메이크업을 선보여 뷰티업계에 선풍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고 그녀가 발간한 메이크업 관련 저서들은 10만 권이 넘게 팔리며 각광받았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그녀만의 독특함이 존재하는 바비 브라운. 이름 자체만으로 빛나는 바비 브라운의 성공은 1%의 센스와 99%의 노력이 만들어 낸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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