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김아련/디자인 이연선]

▶ 해리엇 터브먼 (Harriet Tubman)
▶ 출생-사망 / 1820년 - 1913년 3월 10일
▶ 국적 / 미국
▶ 활동 분야 / 흑인해방운동가

수많은 흑인 노예들을 해방으로 이끈 ‘해리엇 터브먼’은 흑인해방의 역사에 큰 공을 세운 흑인 여성으로서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

-노예로 자라며 자유와 해방을 갈망한 ‘해리엇 터브먼’
해리엇 터브먼은 미국의 한 농장에서 흑인 노예로 자랐다. 당시 미국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부를 늘리기 위해 인력이 필요했는데 이를 충당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데려왔다. 그들은 흑인들을 공장이나 농장으로 데려와 열악한 대우를 하며 노예로 부렸다. 해리엇 터브먼의 조부모도 이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에게 강제로 끌려왔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가족이 이곳저곳으로 팔려가고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해방과 자유를 갈망했다. 성인이 되어 흑인남성인 존 터브먼과 결혼했지만 여전히 신분은 노예였고 열악하고 차별받는 삶이 계속되었다. 그런 그녀는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다가 드디어 29세에 지하철로 인도자의 도움으로 북부 필라델피아로 탈출 했다.

-지하철로의 차장으로 일하며 흑인들을 탈출시킨 ‘해리엇 터브먼’
당시 미국 북부는 남부보다는 흑인들이 살기 나은 곳 이였다. 북부에 있는 공장주 백인들은 공장노동을 수행할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남부의 노예들에게 자유라는 대가를 주어 북부의 공장으로 끌어들였다. 북부로 탈출한 해리엇 터브먼은 지하철로의 차장으로 일하면서 남부에 남아있는 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그녀는 변장까지 해가며 남부로 잠입해 1850년부터 1860년까지 300명이 넘는 흑인들을 북부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리엇 터브먼은 자신이 누린 자유를 다른 흑인들도 누리길 바랐고 많은 흑인들이 자유를 얻는 것을 온 힘을 다해 도왔다.

-흑인의 해방과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활약한 ‘해리엇 터브먼’
1861년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해리엇 터브먼은 흑인에게 자유를 준 북부 편에서 북부 연합군을 도왔다. 당시 그녀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는데 무장 정찰병이자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남부의 중요한 정보를 빼와 북부 군대를 큰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또 그녀는 전쟁에서 직접 탐험대를 이끌며 콤바히 강을 습격해 무려 700명이 넘는 노예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뒤 그녀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급여도 받지 못하고 연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노동자의 삶을 은퇴한 후에도 흑인의 자유뿐만 아니라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미국의 여러 지역을 돌며 여성 참정권을 위한 회의에도 참여했는데 그때부터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해리엇 터브먼이 이뤄온 업적들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흑인의 자유를 위해 일생을 바친 ‘해리엇 터브먼’
이후 미국 사회에서 해리엇 터브먼을 존경하는 분위기가 점차 생겨났고 미국 전역에서 우상이 되었다. 특히 그녀는 1908년에 ‘해리엇 터브먼의 집’을 세웠는데 이 곳에서 해방된 흑인들의 정착과 경제적 자립을 도왔다. 그렇게 해리엇 터브먼은 흑인들을 해방시킨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착까지도 도왔고, 말년에 이곳에서 살면서 숨을 거둘 때까지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지난 2016년 해리엇 터브먼은 미국의 화폐 역사 100년 만에 여성 최초로 20달러 지폐에 들어갈 초상 인물로 선정되었다. 이렇게 그녀의 숭고한 정신과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큰 존경을 받고 있다. 현대에 들어 미국에서 흑인들의 인권은 크게 신장되었지만 불과 50년 전만 해도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심했다. 그 투쟁의 역사에 해리엇 터브먼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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