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86년 아시아게임 이후 전두환 정권은 개헌투쟁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강경한 탄압공세를 취했다. 한편 민족민주운동세력은 건국대 농성투쟁에서 1,300여명의 구속과 개헌서명 서울대회의 무산. 그리고 제헌의회사건 등으로 인해 일시적 침체기에 빠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박종철 고문살인사건은 민족민주운동진영이 분기하는 전환기가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전두환 정부는 4월 13일 특별담화를 통해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올림픽 등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개헌논의를 지양하고 사회혼란을 조성하는 폭력과 좌경세력을 엄정히 다스리겠다.”고 호헌(헌법을 지키는 것)을 발표함으로써 현행헌법에 의한 88년 정부이양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4·13호헌조치가 발표되자 이를 분쇄하고 직선제 쟁취투쟁이 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 조작되었다고 발표하여 국민들이 정부 탄압의 심각성과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었다. 

이에 ‘고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6·10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세대를 다니고 있던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6월 9일).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분기탱천한 국민들에 의해 6월 항쟁이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군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하였지만 미국의 압력이 이를 저지하게 만들었다. 결국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군동원령을 취소하고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의한 대통령선거와 1988년 2월의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개정과 시국관련사범의 석방, 언론자유창달 등을 포함하는 시국수습방안 8개항을 선언하게 된다. 

그리하여 1987년 12월 16년 만에 직선제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게 되었으나 민족민주운동세력은 단일한 대응방침을 합의하는데 실패하였다. 결국 3개의 세력으로 나뉘게 된 민족민주운동세력은 대중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선거 결과 36%를 득표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어 군사정권은 그대로 이어가게 된다. 

6월 항쟁은 국민들의 힘이 군사정권의 권력을 이기는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하지만 단합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들은 정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결국 군사정권이 계속 이어지게 만들어 문민정부의 실현을 늦추고야 말았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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