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박정희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 1979년 12월 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살 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1979년 12월 12일 10·26사태의 수사책임을 맡은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과 9사단장 노태우 소장 그리고 보안사령부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대통령의 사전재가 없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체포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12·12사태). 

신군부의 실권자로 등극한 전두환은 1980년 4월 14일  국군보안사령관과 중아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여 권력 장악에 필수적인 정보권을 통괄하게 되어 내각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 3월부터 시작된 학원민주화운동과 4월 이후의 노동 운동 전개는 5월 2일 서울대집회와 고려대시위를 계기로 하여 대중적 정치투쟁으로 전환되었다. 1980년 5월 14일부터 서울에서는‘민주화 대행진’을 표방한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져 서울 시내가 시위대로 가득 찼는데 이 규모가 4·19 이후 최대 규모로서 ‘서울의 봄’이라고 한다. 

신군부세력은 정치적 주도권을 손쉽게 장악하고 5월 16일 중동 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을 서둘러 귀국시킨 후 청와대 심야시국대책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거하여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가 실시되었고5월 18일 계엄사령부 계엄포고 10호에 의거하여 ‘정치활동의 중지, 대학의 휴교’가 선언되고 김대중 등 26명의 ‘구정치인’이 연행되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운동가 20여 명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로 인해 김대중은 1981년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미국 등의 압력으로 인해 사형 중단이 되었고 전두환 대통령은 김대중의 형량을 무기징역에 처했다 20년형으로 감형시킨 후 1982년 미국으로 강제 망명시켜버렸다.

박정희 정권부터 점점 높아진 민주화에 대한열망이 꽃피던 시기. 하지만 신군부 역시 이 상황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1980년 5월 18일, 신군부는 시위대와 충돌하여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만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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