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60년대의 고도성장은 급속한 공업화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농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부의 저곡가 정책이 계속되어 농촌은 상대적으로 낙하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부는 1971년 농촌사회의 소득을 올리고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북한의 천리마운동에 대항한 것으로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었는데, 초가집의 개량, 농촌도로의 정비, 영농기반의 조성 등 침체된 농촌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 후에는 도시까지 확대되어 총체적인 국가발전 전략으로 발전하였다. 

급속한 공업화와 농촌경제의 파괴로 인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농민들은 노동자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체적인 소득과 부의 성장이 있었으나 계급간의 분배불균형이 더욱 확대되어 소득 격차가 증대되었고 이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 계급이 1960년대에 조직적인 노동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제3차,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각각 1972년과 1977년에 이루어졌다. 1971년에는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국제수지적자 증대와 달러유출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조치를 발효하였다. 이로 인해 전후 유지되어 오던 IMF-GATT체제가 붕괴되었다.

국제통화 불안에 따른 환율의 변동으로 인해 선진각국은 주로 쇠퇴하는 산업을 중심으로 보호무역조치를 강화하였고 1974년 ‘석유위기’가 발생하자 각국의 경기가 정체하여 신보호무역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한국의 경제개발이 저임금을 기반으로 하는 경공업제품수출에 크게 의존하던 상황에서 각국의 보호무역 강화와 고도성장에 따른 임금인상은 기업가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이로 인해 상업차관이 증가하였고 이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는 부실기업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또한 1973년 발생한 1차 오일쇼크와 1975년 월남공산화의 영향으로 직접투자가 줄어들어 국제금융기구로부터의 차입을 비롯한 재정차관이 증가했다. 대외경제여건이 악화되자 정부와 기업가들은 근로시간을 연장하고 유급휴가 단축을 가능하게 하며 노동 쟁의를 제약하는 노동법 및 근로기준법의 개정을 시도하여 노사정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 갔다. 
 
1971년 국가비상사태선언 이후 대통령의 긴급명령에 의해 정부는 3,500억원 규모의 기업 사채를 강제로 동결하고 금리를 대폭 인하하는 긴급재정처분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기업들이 끌어다 쓴 사채의 상환을 동결하여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 관계는 8월 3일을 기준으로 무효화 되었으며 정부가 2천억 원을 마련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단기 고리 대출금의 일부를 연리 8% 장기 저리 대출로 대체하여 기업에 많은 금융 특혜를 허용하는 8·3경제특별조치를 내렸다.  

또한 국외 사정에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경공업제품수출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그리하여 경제 구조에 균형이 잡히고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룩하여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1973년에 준공된 포항 제철과 1978년에 준공된 고리 원자력발전소는 이 시기 중화학공업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1970년대에는 중동의 석유수출국가들이 석유가격을 인상하여 경제발전에 압박을 가했으나 수출은 꾸준히 지속되어 1977년 100억 달러, 1981년에는 2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수출상품에서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90%를 넘어서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월남전 패망 후 건설업체들이 중동으로 진출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벌어들이는 외화들이 엄청난 몫을 하게 되었다. 이런 산업화는 북한과 차이가 나던 경제 격차를 점점 따라잡더니 1970년대 중반부터는 역전하여 빠른 속도로 북한과의 격차를 벌려나갔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SNS 기사보내기